(근친야설) 형의 아내 2 - 1
열 한 살 차이의 도련님과의 불륜의 정사가 못내 꺼림칙했는지 한동안 살갑게 대하던 형수가 사뭇 사무적으로 민석을 대했다.
일부러인 듯 냉담하게 대하는 그녀, 찬 서리가 내려앉은 듯 서늘하게 식어 있는 까만 눈동자.
한순간에 변해버린 형수의 태도에 무척이나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렇게 다시금 변할 형수와의 관계를 고대하고 있던 민석에게 슬픈 소식이 찾아들었다.
형이 교통사고가 난 날은, 대학 입학 후 처음 맞는 여름방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6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일찌감치 찾아온 장마, 점심 무렵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장대비.
늘 그랬듯이 형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귀가 시간을 늦추고 있었고, 늦은 밤까지 민석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의미 없는 웃음을 흘리던 형수.
서먹한 자리를 못내 참아내지 못한 민석이 슬그머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까무룩 찾아든 잠에 빠져들 무렵이었다.
심야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들리지 않는 고개를 어렵사리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2시.
벽에 걸린 시곗바늘은 분명히 2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윽고 들려오는 형수의 목소리.
언제 들어도 묘한 감흥을 주는 목소리였다
어떤 아름다운 음악과 비교해봐도 훨씬 더한 감동을 주던 형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어느새 날카로운 비수인 양 한 옥타브 높아진 톤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혹시 싸움이라도?`
그리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새벽녘 걸려 온 형으로부터의 전화.
사정이 생겨 집에 들어오지 못함을 알리는 전화에 항상 있지는 않지만,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곤 했던 형수이기에 오늘도 그러려니 생각하고, 형수의 가슴팍 닮은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이내 들려오는 나직한 흐느낌 소리.
`울고 있다. 내 사랑 혜린이. 코스모스 닮은, 하늘 닮은 나만의 혜린이 울고 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강렬하게 치밀어 올랐다
누구도, 나 아닌 어떤 사람도, 설령 형일지라도 혜린에게 눈물짓게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 속옷 바람으로 퉁기듯 뛰쳐나간 거실.
어스름한 어둠 속.
하얀색의 잠옷을 곱게 입은 나만의 그녀가 전화기 앞에 주저앉아 양 무릎에 고개를 깊숙하게 묻고 오열하고 있었다.
이따금 섬광이 작열할 때마다 밝아지는 실내.
이후 들려오는 천둥소리.
`이건, 이건 안좋은데`
민석의 가슴은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예감, 예감이었다.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이 형수의 주변, 그것도 아주 가까운 주변에 발생했다는 예감.
좋지 못한 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형수가 그 일로 인해 슬퍼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일인지, 또 그 일로 인해 받는 상심의 정도가 얼마만큼인지에 대해 감히 형수에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잦아든 형수의 흐느낌.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어떤 말에도 당황하지 않을 마음의 준비.
민석은 형수의 도톰한 입술에서 흘러나올 말에 대해 나름대로 준비하며, 뚫어질 듯 형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도련님. 사고 났대요. 그이가, 그이가. "
민석을 바라보는 형수의 눈이 물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순간 느껴지는 처연한 아름다움.
사고 소식보다 더욱 놀라운 형수의 색다른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놓았던 민석이 자신의 속물근성을 애써 꾸짖으며, 형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고라니요? 설마 형이?"
어려서부터 유일한 존경 대상이었던 큰형. 그런 큰형이 사고를 당했단 소식을 들었음에도 걱정스러움의 이면에 떠오르는 안도감.
내면에 떠오르는 이중적 생각에 혼란스러워진 민석이 슬며시 치밀어 오른 안도감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형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사람인데. 형수님이 잘못 들었을 거예요."
보드라웠다
일견, 가녀린 듯한 형수의 어깨는 말없이 부드러운 감촉을 선사하며 민석의 가슴에 무너지듯 닿아왔다,
"도련님, 이제 어떡해요. 이제."
민석의 가슴에 기대어진 형수의 얼굴이 가늘게 떨리며 참을 수 없었던 듯 커다란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실이야. 형이 사고를 당한 거야.`
민석 자신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지만,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어깨를 다독거려주었다.
그게 남자니까. 그녀의 아픔, 슬픔, 모든 것을 끌어안아 주어야 하니까.
더구나, 그녀는 오직 하나뿐인 민석의 여자니까.
"그래. 형 지금 어디 있대요? 가 봐야죠. 얼마나 다쳤는지."
의외로 차분한 민석의 말에 퍼뜩 놀란 듯 고개를 치켜든 형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래요. 가 봐야죠. 도련님도 같이 가 줘요. 네?"
다짐하듯 민석을 향해 눈빛을 빛내는 형수에게 고개를 끄덕거려준 민석이 형수의 몸을 꼭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형수가 사 준 헐렁한 반소매 티셔츠에 청바지를 대충 걸치고 나올 때까지도 형수는 우두커니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거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형수님도 못 갈아입어야지요."
자신에게 다가서는 민석의 품에 무너지듯 안겨 온 형수가 슬픔에 복받쳐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기운이 없어요. 도련님이."
그런 형수의 몸을 번쩍 안아 든 민석이 안방 침대 위에 형수의 몸을 눕힐 때까지 멍한 시선에 어떠한 변화도 감지되지 않았다.
옷걸이에 걸린 검은색의 쫄바지와 티셔츠 하나를 찾아 든 민석이 다가서자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민석을 향해 슬픔 가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해요. 이런 일이나 시키고."
아무 말 없이 침대에 엉덩이를 걸친 민석이 잠옷의 허리끈을 풀어내고 깃을 좌우로 펼치자 그 와중에도 부끄러운 듯 허벅지를 바짝 오므리는 형수였다.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형수의 몸매가 어둠 속에서 민석을 유혹하고 있었지만, 마치 석상처럼 굳어진 표정으로 거침없이 형수의 잠옷을 벗겨냈다.
쫄바지.
빚은 듯 아름다운 형수의 각선미.
바짓가랑이가 위를 향해 올라갈 때마다 사라져가는 능어.
그 일이 있던 며칠 후 부끄러움 무릎 쓰고 선물한 분홍색의 앙증맞은 팬티가 소담스러운 형수의 하체를 슬그머니 가리고 있었다.
저절로 살짝 들려지는 형수의 기름진 하체를 검정의 천 조각이 가릴 즈음에야 민석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옅은 하늘색의 티셔츠.
민석의 눈길은 브래지어를 찢을 듯 봉긋 솟아오른 젖가슴에 닿았다.
저절로 뜨거워지는 민석의 얼굴.
형수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받쳐 들고 티셔츠를 통과시켰다.
이제 갓 순서를 익힌 어린아이처럼 팔을 굽혀 구멍 속으로 통과시키는 형수의 겨드랑이에 빽빽하게 돋아난 수풀. 마치 아랫도리 부근의 그것처럼 묘한 관능으로 일렁거리는 듯한 모습에 민석의 눈 주위가 붉게 물들었다.
"형수님. 어떤 경우에도 형수님 옆에는 제가 있으니까 절대로 당황하면 안 돼요."
민석이 길게 드러누운 형수의 부드러운 육체를 살그머니 끌어안으며 속삭여주었다.
"고마워요. 도련님."
"고맙긴요. 후후,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어요."
의아해하던 형수의 표정이 어떤 생각을 떠올렸는지 발그레하게 붉어지는 듯했다.
"자, 일어나요."
부드러운 손목을 잡아당기자 형수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우산이었지만, 굵은 빗줄기는 밖을 나서자마자 두 사람의 허벅지 아래를 사정없이 적셔버렸다.
민석은 사랑스러운 형수가 비라도 맞을세라 저어하는 마음에 형수의 어깨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런 민석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이따금 민석을 바라보는 형수의 얼굴에 미소가 언뜻언뜻 맺혀 있었다.
새벽인데도 대학병원은 놀라울 정도로 북적거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 형수를 대신해 이리저리 묻고 나서야 형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응급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자된 남자.
그 앞에 붙어있는 명찰이 형편없이 일그러진 남자가 민석의 형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온몸에 휘감긴 형의 몸뚱이.
할 말을 잊은 채 형수를 돌아보았으나, 그녀 역시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침대 위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송민호씨 보호자 되십니까?"
여기저기 빨갛게 피 칠 된 가운을 걸치고 다가온 의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민석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기운차게 대답할 무렵에야 형수의 시선에 초점이 잡혔다.
"네. 그래요. 제 형입니다. 어떤가요? 상태가?"
민석의 강렬한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웠는지 고개를 슬며시 형 쪽으로 돌린 의사가 한숨을 토해냈다.
"가망이 없습니다. 너무 늦었어요. 조금만 일찍 왔더라도. 휴!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밖엔."
형수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는 모습이 망막에 잡혔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할 말 다 했다는 듯 몸을 돌려 사라져 가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의사.
생각 같아서는 그에게 매달려 형을 살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형의 입에 대어져 있던 산소마스크가 매정한 간호사에 의해 떼어진 것은 그 밤이 새어버린 이른 아침이었다.
아직도 내리는 줄기찬 빗줄기가 응급실의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는 아침 시간, 형은 그렇게 가버렸다.
어떤 때는 든든한 형으로써, 어떤 때는 맘씨 좋은 친구로서, 어떤 때는 경쟁자로서 민석의 옆에 자리하고 있던 커다란 나무는 그 뿌리조차 송두리째 뽑힌 채 민석의 곁을 떠나갔다.
형의 죽음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민석에게나, 혜린에게나.
벽제의 화장터에서 곱게 갈린 뼛가루로 변한 형을 고향 마을 바닷가에 뿌리고 나자마자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민석의 거취 문제.
자랑스러운 형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더부살이가 아직 새파랗게 젊은 며느리의 전도에 미칠 영향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고, 설령 형수가 이른 시간 안에 재가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벌써 어른이 된 시동생을 맡긴다는 것이 영 께름칙했을 것이었다.
형의 죽음을 뒤로하고 사나흘 시골 마을에서 묵고 있는 내내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하던 민석이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논의는 어느새 구체성을 띠어 방학이 될 때까지만 형의 집에 머물고, 가을 학기부터는 자그마한 하숙이라도 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학교에 가야 한다는 핑계로 올라온 서울은 형이 없음인지 아니면, 어머니, 아버지의 염려를 이해하고 있던 탓인지 영 남의 집 같기만 한 아파트.
놀라울 정도로 수척해져 있는 형수가 처연한 미소를 띤 채 민석에게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 서른이 된 딸이 혼자 있음을 걱정했는지 형수의 어머니가 소파에 자리하고 앉아 있었다.
쉰이 넘은 나이일 텐데도 형수의 결혼식 때 본 모습 그대로였다.
형수가 어머니를 닮았는지 한눈에 보기에도 그윽한 향내 물씬 풍기는 지적인 아주머니의 형상으로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그녀는 형수와 자매간이라 해도 믿어지리만치 젊어 보였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보인 민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리는 형수의 어머니였다.
"어서 와요. 힘들었죠? 형 장례 치르느라."
"힘들긴요. 형수님이 고생하셨죠."
"에구. 몹쓸 사람. 이 많은 사람한테 마음고생, 몸 고생시켜가며 그리도 일찍 가다니. 에구. 몹쓸 사람."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는 어머니를 향해 형수가 그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무라듯 바라보았다.
"엄마. 그만해."
딸의 말 한마디에 흘러나오던 말을 멈춰버린 형수의 어머니가 눈치를 살피듯 민석을 흘낏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소외감을 느낀 민석이 조용히 인사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 시간 내내 무거운 침묵이 식탁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싸움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아무 말 없이 숟가락만 열심히 놀리던 그들.
약속이나 한 듯 숟가락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민석에게 당연하다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침대 위에 길게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어도 떠오를 듯 잡히지 않는 생각들.
어머니, 아버지의 말씀대로 이 집을 나가야 할까? 그럼, 코스모스 닮은 그녀는, 하늘 닮은 그녀는.
"엄마. 좀 조용하게 얘기해요. 도련님 듣겠어."
혼란스럽게 떠오른 상념은 형수의 조심스러운 말에 저 멀리 사라져 버렸고, 대신 뚜렷한 정신이 상민의 머리를 지배했다.
"내가 못 할 소리 했니? 남편 죽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다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니 나름대로 길을 찾아야지? 안 그래?"
내려치듯 단호한 형수 어머니의 목소리가 고막을 울려온 순간 상민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떨리고 있었다.
"누가 뭐래요? 엄마는."
쿵 하고 무엇인가가 내려앉는 듯한 기분. 형수는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방향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물론 어머니의 권유라는 것을 핑계로 삼아.
아련하게 떠오르는 배신감에 안색을 굳힌 민석이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모녀간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니까, 저 젊은 총각 내 보내라. 남들이 보면 뭐라고 그러겠니? 무슨 열녀도 아니고 다 큰 총각을 남편도 없이 수발들 수는 없잖아."
"내가 적적해서 못산다니까 자꾸 왜 그래요?"
형수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자그마한 위안을 주고 있었다.
최소한 지금의 형수는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민석과의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에
"적적하면 채린이 들어와 살라고 하면 되잖아."
"엄마도. 내일모레면 시집갈 애를."
"얘. 날짜도 안 잡힌 시집 얘기는 뭐 하려 해. 아직 멀었으니까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 집 넓으니까 결혼해서도 여기 들어와 살라고 해도 되겠다."
"이 집이 어디 내 집이우? 민호 씨 집이지. 도련님도 내보내라면서 이 집은 내 몫으로 챙기란 말이우? 엄마.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인 줄 이제 알았네."
이죽거리는 듯한 형수였다.
"남편 죽으면 그 재산은 다 마누라 차지지. 그래, 사돈집에서 이 집 달라고라도 할까 봐?"
"엄마!"
형수의 목소리가 한결 날카롭게 변한 것이 적잖이 화가 난 듯했다.
"아니, 이것이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우리 시댁 식구들이 그렇게 몰지각한 사람들인 줄 알아요? 얼마나 좋으신 분들인데. 도련님만 해도 그래요. 나를 얼마나 따르고 아껴주시는데. 흑흑. 엄마 너무해요."
답답함에 급기야 울음을 터뜨린 형수. 뒤이어 들리는 형수 어머니의 혀 차는 소리.
`휴! 나가야겠어. 이 집에서.`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답안을 작성해 내고 며칠째 집에 머물며 좀처럼 가실 생각을 하지 않는 형수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해 내고, 도서관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무렵.
"어머! 민석 씨!"
어디선가 들려오는 봄날 햇살같이 밝고 맑은 목소리.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 돌려 바라보자 연한 갈색으로 예쁘게 물들인 머리칼을 치렁하게 늘어뜨린 여자 하나가 민석을 바라보며 생긋 웃고 있었다.
170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늘씬한 키, 베이지색의 미니스커트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여자의 모습, 언뜻 그녀의 모습을 기억해 내지 못했던 민석이 단말마의 신음을 내뱉으며 얼굴을 활짝 폈다,
그녀였다. 김윤지.
대학 입학 후 처음이자 마지막 미팅에서 만났던 여자, 형수에게서 맛봤던 가슴 떨림을 느끼게 해 주었던 여자, 한 살 많은 나이답게 푸근함을 전해주었던 여자.
"어? 여긴 웬일이에요?"
"인제야 생각해 낸 거예요? 서운해라. 난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는데."
입술을 삐죽거리는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어질 정도로 앙증맞았다.
"그리고, 그게 뭐예요. 그게!"
"네? 뭘요?"
무슨 소린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져 멍한 표정을 짓는 민석을 향해 "까르르" 웃어 보인 윤지가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하얗게 흘겼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던가 뭐, 그런 인사 하면 어디 덧나요? 보자마자 웬일이냐고 묻다니. 너무해."
"아, 그거요? 원래 내가 좀 무뚝뚝하잖아요. 잘 알면서."
쑥스러움인지 미안함인지 모를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민석에게 성큼 다가선 윤지가 민석의 팔에 자기 팔을 깊숙이 꽂았다.
"가요."
"어, 어딜요?"
자기 팔을 잡아끄는 윤지의 행동에 잔뜩 당황한 민석의 말에 달콤한 미소로 대답하는 윤지였다.
"여기 서서 얘기할 거예요? 어디 근사한 카페라도 가야지. 잔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요."
막무가내로 자기 팔을 끄는 윤지의 당돌함에 어이 없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민석이었다.
교문 밖, 북적거리는 인파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자연스럽게 좁혀졌고, 거리의 좁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윤지의 봉긋한 젖가슴이 민석의 팔꿈치에 와 닿았다.
고무풍선 처럼 부드러운 젖가슴의 느낌에 민석의 아랫도리 어림에서 조그마한 반항이 시작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이후 처음 느껴보는 여자의 뭉클함이었고, 형의 죽음으로 한 번도 위로받지 못한 녀석이었기에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항인지도 몰랐다.
청바지 앞자락을 밀어 올리는 녀석의 움직임에 적당히 어정쩡한 걸음으로 윤지를 따라 들어선 곳은 학교 앞 지하 카페, 꽤 잘 꾸며진 실내장식이 아늑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칸막이 낮은 테이블에 자리하자 예쁘게 갖춰 입은 아가씨가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커피 주세요. 헤이즐넛으로."
윤지의 간단한 말에 동감이라는 듯 민석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아가씨가 살짝 고개 숙여 보이고 자리를 떴다.
"얘기 들었어요. 형님 돌아가셨다면서요?"
윤지가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누구한테 들었어요?"
"후후. 누구한테 들었을 거 같아요?"
이런 때의 윤지는 장난꾸러기 소녀 같은 짓궂음이 그득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학교 친구들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도저히 연결할 수 없음에 더 이상 추리해보기를 포기해 버리고 두 손을 번쩍 들어버렸다.
"언니한테 들었어요. 혜린이 언니."
나풀거리는 듯한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의외의 말에 둔기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지는 민석이었다.
"네? 혜린이 언니라뇨? 혹시 우리 형수님?"
"딩동댕! 맞아요. 호호호"
밝게 웃는 그녀와는 반대로 더욱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민석. 그런 민석의 모습에 더한 재미를 느꼈음인지 연신 깔깔거리는 윤지.
"어떻게 된 일이에요?"
"후후. 간단해요. 민석 씨 형수님이 우리 언니예요. 사촌 언니. 우리 아빠하고 언니네 아빠가 형제간이거든요. 비록 배가 다르긴 해도. 후후. 몰랐죠?"
점점 헤어 나오기 어려운 미궁에라도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
"민석 씨 전화번호가 어쩐지 낯익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봤죠. 혹시 언니 맞냐고. 아무래도 배다른 형제간이니까, 우리 아빠하고 언니네 아빠 사이가 별로거든요. 어렸을 때는 무척 좋아했었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형제분들의 사이가 더 안 좋아져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었어요. 후후. 민석 씨 덕분에 잃었던 가족을 찾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걸 느꼈어요."
이제야 미로의 입구가 어슴푸레하게나마 보이는 듯했다.
"나, 민석 씨 방에도 가 봤는걸요. 5월 말쯤 되나? 몰랐어요?"
머릿속에서 섬광이 작열하는 듯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5월의 어느 날, 형수와의 관계, 어느 순간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형수의 태도. 모든 것이 눈으로 본 듯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다소 형식적인 민석의 태도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연신 밝은 표정으로 재잘거리는 윤지의 모습. 오랜 장마 끝의 햇살 마냥 민석의 우울했던 마음도 어느새 활짝 개어갔다.
헤어질 무렵, 윤지가 건네준 조그마한 메모지 위에는 예쁜 글씨의 아라비아 숫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핸드폰, 전화해 달라는 의미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잔뜩 기대에 찬 윤지의 눈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두세 번 고개를 끄덕거려주자 예의 밝은 미소로 답하는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