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 2부 - 1
월요일 아침 회의 시간, 대표 변호사가 회의실 앞에 섰다. 그는 변호사 한 명 한 명을 지목하며 짧게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집단 소송 마무리까지 다들 마음 놓으면 안 되는 거 알죠? 집단 소송에 주력하면서 각자 맡은 사건에도 최선을 다해 주세요. 이동환 변호사는 토지 보상 소송 감정 평가 나온 거 확인하고, 이지은 변호사는 특허 소송 철저하게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최미희 변호사?”
“네.”
“금융 사건 서면 작성 끝났어요?”
“네. 그런데 의뢰인이 사건에 협조적이지 않은….”
이어지는 내 말을 파트너 변호사는 뚝 잘라 냈다.
“그럼 최미희 변호사는 서면 작성만 마무리하고 라운지 바 살인 사건에 투입되는 거로 하죠. 임태환 변호사가 최미희 씨 대신해서 마무리하는 걸로 하고. 최미희 변호사? 라운지 사건은 형사가 이미 진행 중인 사건이라 추가로 민사만 맡아 주세요.”
파트너 변호사는 탁, 하고 다이어리를 덮으며 회의의 끝을 알렸다. 자리에서 뒤따라 일어선 변호사들이 우르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기막혀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문을 나서는 파트너 변호사를 막아섰다.
“잠시만요, 변호사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전 이 상황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우뚝 멈춰 선 파트너 변호사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단순한 업무 조정이에요. 지금 상당히 과로하고 있는 것 잘 알고 있어요. 라운지 바 사건도 만만치 않아요. 무리하지 말라고요.”
“전 괜찮아요. 지금까지 사건 몇 개씩 병행하면서 충분히 잘해 왔어요. 특히나 금융 사건은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아시잖아요. 끝까지 제가 마무리하고 싶어요.”
“최 변호사 덕분에 여기까지 끌어왔다고 생각해요. 상대방 결정적 증거 무력화시킨 것도 최 변호사 덕분이고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표님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열심히만 해 줘요. 대표님도 최 변호사 눈여겨보고 계세요.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파트너는 대충 나를 어르고 자리를 뜨려 했다. 나는 다시 파트너 변호사 앞을 막아서며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요. 전에 행정소송에서도 막판에 제 이름 빼신 거, 저 그냥 넘어갔어요. 그때 저한테 뭐라고 하셨죠? 분명 다음에 좋은 일….”
“최 변호사.”
파트너 변호사는 차갑게 내 말을 잘라 냈다. 가식적인 미소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녀는 똑바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 사건, 누가 가져왔죠?”
“…….”
“임태환 변호사가 가져온 사건이죠. 그 전에 행정소송도 임 변호사가 가져왔죠. 임태환 변호사 이름은 뺄 수 없어요. 다른 파트너 변호사들 이름을 뺄 수도 없죠.”
“…….”
“제 말 이해하죠?”
파트너 변호사는 애석한 얼굴이었다. 물론 손톱만큼의 진심도 느껴지진 않았다. 얄밉게 돌아서는 여자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최 변호사, 축하해! 이번에 어려운 사건 따냈다며. 그거 잘만 하면 최 변호사도 이제 새끼 딱지 떼겠어. 기대가 아주 크네.”
복도에서 만난 대표 변호사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 나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내키지 않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자 대표는 이미 복도 저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그 뒤를 따르는 임태환이 픽, 하고 무시하는 웃음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이도 어린 놈이 입사하고 몇 달 동안 먼저 인사하는 꼴을 못 봤다. 인사도 사람 가려 가면서 자기한테 도움 될 인물한테만 하는 놈이었다.
고위 공직자인 부모를 업고 입사한 임태환은 입사 때부터 나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의 일을 나에게 떠밀기도 부지기수였고, 본인이 한 실수를 나에게 덮어씌운 적도 있었다. 그래도 출셋길을 달리는 건 임태환이었다. 실력도 없는 놈을 위에서 부지런히 밀어주었다.
임태환이 참여하는 사건은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사건들이고 나에게 돌아오는 사건은 이미 1심에서 망하고 온 사건, 승소 가능성이 낮은 사건, 쟁점이 꼬여서 보이지 않는 사건, 한마디로 대부분 변호사가 피하는 사건들이었다.
이번에 맡은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들이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나한테 떠넘기는 거면서 큰 기회라도 준 듯 선심 쓰듯이 말하고 있다. 그러고는 실패하면 역시 능력 없다고 떠들어 대겠지.
사무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새로 투입되는 라운지 사건의 소송 자료였다. 맨 위에 있는 소장을 들어 사건 개요를 쭉 훑어보았다.
고위층 자제들끼리 바에서 여자를 불러 파티를 했고 다음 날 아침 여자 한 명이 사망했다. 사람은 죽었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 그중에 가장 뒷배 없는 애가 죄를 독박으로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뒷배 없는 사람이 내 의뢰인이었다.
종이를 내려놓다가 문득 상대 로펌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정지헌의 흔적을 발견할 때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거 어디에다 놓을까요?”
문 앞에 선 사무장님이 물어 왔다. 손에는 서류 상자를 들고 있었다. 나는 책상을 치우고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에 놔 주세요.”
사무장님은 힘겹게 상자를 내려놓고 툭툭, 서류를 두드렸다.
“참고인 진술 기록이에요. 더 필요한 자료 있으세요?”
“천천히 읽어 보고 필요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보다… 상대측 담당 변호사 더 안 붙는대요?”
사무장님은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법원에서 따로 연락 온 건 없었어요.”
“꽤 큰 사건인데 변호사가 단출해서요.”
“네. 뭐, 근데 변호사야 언제든 추가될 수 있으니까요.”
“네…. 그렇죠.”
내 입에서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수고하셨어요. 나가 보세요.”
고개를 끄덕이고 보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사무장님이 곤란한 듯 입을 뗐다.
“저 그게… 당장 이번 주 안에 준비 서면부터 작성하셔야 하는데요.”
“그럼 기일 연기부터 해야겠네요.”
“그게 말입니다. 이미 한 번 연장해서 아마 어려울 것 같은데요.”
“오늘 사건 받았는데 사안 분석해서 이번 주까지 준비 서면을 써야 한다고요?”
사무장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구속된 상태로 초기 진술이 끝난 사건이에요.”
시작부터 꼬였으니 적당히 하고 치워 버리라는 뜻이었다.
형사 사건의 골든 타임은 유치장까지였다. 그 이후에 밑그림을 망쳐서 오면 도와주고 싶어도 손쓸 도리가 없다.
그때 쾅, 하고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같은 방을 쓰는 파트너 변호사가 들어왔다.
“의원님, 요새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그래도 날 추워지기 전에 풀 좀 밟으셔야죠. 제가 한번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사무장님은 내게 눈인사를 하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작성해 놓은 서류를 들고 파트너 변호사에게 다가갔다.
통화를 마친 그는 골프 가방을 짊어지고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젊을 때는 실력 있는 변호사로 꽤 유명했다던데 방송 출연으로 얼굴을 알린 뒤로 변호사 일은 부업처럼 하는 양반이었다. 그래도 여기저기 인맥은 넓어서 큰 사건을 곧잘 따 오곤 했다.
그리고 그가 따 온 사건들은 나 같은 저임금 새끼 변호사들에게 맡겨졌다.
“금융 사건 서면 초안 끝났는데요. 보시겠어요?”
“나 지금 좀 바쁜데.”
그가 시계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감정 평가서 나온 건 보셨어요? 관련 기관에도 송부 촉탁 신청을 하긴 했는데요.”
그는 보던 서류를 탁, 하고 내려놓으며 말을 끊었다.
“피해자들이 집단으로 고소한 거라 어차피 이번 소송은 이기기 어려워. 그냥 대충 해.”
그는 애초에 이길 가능성이 적은 사건은 관심이 없었다. 똑똑, 하고 사무실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들어왔다. 그녀는 다급한 얼굴로 용건을 알렸다.
“변호사님, 금융 소송 상대방 쪽에서 증거 자료 제출한 거 보셨어요?”
“증거 자료 왔어요?”
“네. 근데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비서가 내미는 서류를 건네받았다. 상대방의 반박 자료에는 지금까지 세운 전략을 쓸모없게 만드는 결정적 증거가 있었다.
“이게 뭐야.”
당장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한테는 분명 피해자와 사건 이후 접촉한 적 없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 왜요?
“상대방 증거 자료에 통화 녹음이 있어요.”
- 그럼 했나 보네요.
수만 페이지 기록을 며칠 동안 밤새워 가면서 검토하고 전략까지 다 짜 놨더니 한다는 소리가, 했나 보네요? 다 된 밥상을 걷어차는 것도 유분수지.
쭉 혈압이 상승한다. 허리를 짚고 휴대 전화를 반대쪽 귀에 옮기며 소리를 높였다.
“저한테는 실수하신 걸 솔직히 말씀하셨어야죠. 그래야 제가 대책을 세우죠. 법정에 나가면 상대는 그 부분부터 공격할 텐데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 변호사님, 신입이시죠? 문자 내역들 제가 분명히 준비 서면에서 빼 달라고 말했는데 넣으셨죠? 아, 그리고 CCTV도 변론에서 빼 주시고요. 이번에 제대로 안 하면 저 다른 변호사로 바꿀 거예요.
본인의 실수를 언급하자 의뢰인은 공격적으로 나왔다. 그리고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툭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게 대충 하라니까. 어차피 가능성 없는 사건이야.”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는데 파트너 변호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얄밉게 한 소리 하며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되면 다시 전략을 짜야 했다. 다른 법 조항을 적용할 수는 없는지 하급심부터 샅샅이 뒤져 봐야 하고, 상대방 서면에서 파고들 부분은 없는지 검토하고, 새로운 증거를 찾아서 입증하고….
라운지 사건도 이번 주까지 준비 서면 써야 하는데 이걸 언제 다 한담.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다. 심지어 의뢰인조차도. 이쯤 되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오만 생각이 다 든다. 하긴 전생까지 갈 것도 없지.
하아,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며칠 동안 내가 눈에 불을 켜고 판세를 뒤집기 위해 증거를 찾아 헤맨 의뢰인은 작전주로 여러 번 투자 사고를 일으킨 전문 주식 투기꾼이었다. 합법적으로 사기를 치는 인물을 사회에 돌아다니게 하도록 나는 매일 밤을 새우며 노력하고 있다.
아직도 성공에 목말라 있고 위로 올라가고 싶지만, 그 말은 더럽고 치사하게 일을 해야 함을 의미했다. 학교 다닐 때 이런 사실을 내게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지는 꽤 되었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면 학교 다닐 때가 생각났고 어쩔 수 없이 생각의 끝은 정지헌에게 가 닿았다.
피곤한 얼굴로 서류를 집어 드는데 책상 위에 놓인 커피와 조각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뭐예요?”
“저기… 이상현 변호사님이 주고 가신 거예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연이어 한숨을 내쉬었다. 비서는 내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케이크를 치웠다.
회식 때 옆자리를 사수하고 일도 없는데 내 방에 들락거리고 옆에서 미적대는 눈길은 진작에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빨리 고백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속 시원히 얼른 차 버리게. 저러고 얼쩡거리니 더 짜증 났다.
기록 무더기에 파묻혀 허우적대다가 고개를 드니 저녁 시간이 지나 있었다. 외국 판례까지 샅샅이 뒤져서 물고 늘어질 건수를 찾았지만 별 소득은 없다.
해결할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집중력은 떨어져 머릿속이 멍하다. 이제는 글씨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더 앉아 있는 건 무리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 회의실 겸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는 이미 자리 잡고 앉은 동료들이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근로 시간 단축에 관한 시사 프로였다. 개정안에 올라서 매번 선거철만 되면 돌림노래처럼 되풀이되는 주제였다.
동료들은 저거 우리한테도 적용되긴 하느냐고, 자조 섞인 대화를 나누었다. 몰라서 하는 말들은 아니었다.
어소들 사이에 있던 노무사는 산재 하나 더 맡으면 내가 산재당할 판이라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들 연이은 야근과 주말 근무에 지쳐 있었다. 회사에서는 비교적 값싸게 부려 먹을 수 있는 어소에게 과다한 업무를 떠맡겼다.
나는 커피포트 버튼을 누르고 그들의 대화를 흘려들었다.
저런 푸념도 인턴 때나 할 수 있었지, 이제는 부조리한 현실에도 그러려니 한다.
시험만 합격하면 뭐라도 될 줄 알았지. 꿈에 부풀어 있던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우스웠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를 후후 불면서, 진짜 재량 근로자가 산재당하면 얼마나 나오려나, 방금 노무사가 던진 말을 떠올리며 법리와 판례를 따져 보았다.
본능적으로 내 목숨값을 셈해 보다가 머리 식히러 나와서까지 이러고 앉아 있는 모습이 한심했다.
그런 곳에 쓸 머리가 있으면 들어가서 서면이나 한 장 더 써야지. 테이블에 기댄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화면이 바뀌면서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슈트를 입은 남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남자의 서늘하고 깊은 눈빛이 화면을 뚫고 내게 내리꽂히는 것만 같다.
나는 숨을 삼키며 흠칫 몸을 굳혔다. 마음의 준비 없이 습격 받은 사람처럼 본능적인 몸의 반응이었다.
예전처럼 지헌의 흔적을 발견하고 도망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몰려드는 죄책감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수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는 날카롭고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소 인간미 없이 느껴질 정도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쟤가 정말 나와 함께한 정지헌이 맞나 싶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화면 속 지헌은 정말 냉철하고 프로페셔널한 변호사처럼 보였다. 과거의 음울하고 집착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한 번쯤 만나서 예전 관계를 잘 마무리 짓고 싶기도 했다.
짧은 인터뷰가 끝나고 화면은 곧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나는 멍한 얼굴로 패널들의 갑론을박 토론을 지켜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사무실로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눈은 서류를 보고 있지만, 머릿속은 지헌의 잔상이 남아 어지러웠다. 결국 서류를 책상 위에 던져 버리고 창가에 섰다.
법률은 과거에 만들어져 현재 사건에 적용되기 때문에 늘 한발 늦고 그 자체로 구멍이 숭숭 뚫린 불완전한 존재였다.
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한 수많은 판례와 학설들은 실전에 나오니 아무 쓸모가 없었다. 필드에 나오니 판례도 없는 사건,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케이스가 수두룩했다. 답도 없는 문제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다 가끔 정지헌 생각이 났다.
지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오늘도 사건을 분석하며 나도 모르게 지헌의 논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지헌이 내게 미친 영향력을 실감한다.
지헌은 내게 법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 법에 대한 뼈대를 세워 주었다. 지헌이 알려 준 틀로 나는 사건을 바라보고 쟁점을 찾고 있었다.
기억 속에 묻어 둔 지헌을 자주 꺼내 보는 이유였다.
창밖으로 깜깜한 밤을 밝게 빛내는 법조 타운이 보였다.
정지헌도 저 불빛 어딘가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있겠지, 싶다가 문득 그쪽 로펌은 얼마 전 땅값 비싼 동네로 이전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같은 업계에 일하는 특성상 정지헌 소식은 알고 싶지 않아도 전해 듣게 된다.
전원 합의체 판결을 유도해 낸 변호사로 연수원에서 공부할 때 이름을 전해 들었고, 얼마 전에는 첫 국민 참여 재판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본 기억이 났다.
지헌은 존속 살해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의 변호사였다.
기자는 변호사 윤리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지헌은 법치 국가는 정의 보호가 아닌,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는 국가라고 짤막하게 답변했다.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인물이라도 절차적 정당성이 지켜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지헌은 무엇에도 흥분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논리와 이성으로 점철된 냉혈한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어렸고 순수했고 맹목적이었으며 병증 같은 감정에 휩싸였던 지헌을 안다.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쉽게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우연히 정지헌 소식을 들은 날은 온갖 회한이 밀려들어 마음이 심란했다.
모두 퇴근한 사무실은 적막했다. 이런 날은 혼자 집에 들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술 한잔하면서 적당히 말 상대 해 줄 사람, 그러면서 뒤탈이 없을 사람. 휴대 전화를 들어 충동적으로 이상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습관처럼 전화 목록을 뒤적이다가 관두었다.
같은 업계에 있는 남자와 엮이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그렇게 겪었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서면 초안을 마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텅 빈 도로를 달려 내가 도착한 곳은 어느 라운지 클럽 앞이었다.
차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세련된 외관을 한 건물은 간판이 없어 정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인맥들끼리 알음알음 모이는 공간인 듯싶었다.
비밀스러운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잔잔한 재즈 음악이 나를 맞아 주었다. 평일 저녁인데도 가게 안은 적당히 북적였다.
“무알코올 칵테일 한 잔이요.”
바에 앉으며 주문했다. 바텐더는 흥미로운 눈길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네.”
남자의 호기심을 무심히 받아쳤다. 남자는 시선을 나에게 둔 채 능숙하게 칵테일을 제조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단골만 주로 오는 곳인데.”
“친구에게 소개받았어요.”
주위를 쓱 훑어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여기서 만난 남자하고 잘되고 있다고 해서요. 그러니까 상류층 남자들이요.”
알 만하다는 얼굴로 남자가 웃었다.
“당신 정도 외모라면 어렵지 않겠네요.”
그러면서 내게 제조한 칵테일을 내밀었다. 바다색처럼 시리도록 푸른 빛깔이었다. 나는 잔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고마워요.”
“실은 당신 기자인 줄 알았어요.”
“그런 말 처음 들어요.”
“아니면 짭새거나?”
“하필 재수 없게 경찰이라니.”
무심코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직업 특성상 보수적으로 옷을 입긴 하지만 경찰이라니. 경찰과는 사이가 영 껄끄럽다. 남자는 양해를 구하듯 웃어 보였다.
“요새 가게에 시끄러운 일이 좀 있어서요.”
“시끄러운 일이요?”
모르는 척 되물었다.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들어 봤자 재미없을 거예요. 골치 아프기만 하죠.”
조금 전까지 사무실에서 남자가 말한 재미없는 일을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보다가 나왔다.
클럽에서 주기적으로 졸피뎀 강간 사건이 벌어졌고, 클럽 사장 역시 고위층 자제들과 친분이 있는 관계로 증거 제출에 비협조적이었다.
진짜 골치 아프긴 했다.
“괜찮아요. 전 트러블을 좋아하고, 밤은 기니까요.”
눈을 내리깔고 낮게 속삭였다.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시계를 흘끔 확인하고 상기된 목소리를 쏟아 냈다.
“30분 뒤면 퇴근이에요. 같이 술 한잔할래요?”
“좋아요. 단, 이거 한 잔만 더 주시면요.”
다 비운 잔을 흔들었다.
30분간의 대화로 남자에게 얻어 낸 건 사장의 엄청난 여성 편력뿐이었다. 30분간 투자한 시간이 아까웠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슬그머니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와요. 보고 싶으니까.”
남자의 말에 떫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돌아서자마자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화장실을 가는 척하다가 방향을 틀어 2층 라운지로 올라갔다.
클럽은 2층 라운지에서 아래쪽 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조였다. CCTV도 1층에 몰려 있어 2층은 더욱 은폐되어 있었다.
주위 눈치를 살피며 슬쩍 휴대 전화를 꺼내 1층 홀과 2층 라운지 사진을 찍었다. 살인 사건이 났는데도 영업에는 지장이 없는지 2층 룸은 거의 다 차 있었다.
일단 무혐의로 뒤집을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지 살펴보고, 가능하면 집행 유예로 노력하고,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으면 합의금 많이 줘서 형량이라도 줄여 본다.
선택 가능한 옵션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느 것이 승패 확률이 높을까, 머릿속으로 각 옵션의 장단점을 따지며 2층 복도를 걸어갈 때였다.
복도 끝에 살짝 열린 사무실 문이 보였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 사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 있는 모니터는 여러 개의 화면으로 분할되어 은밀한 2층 룸을 비추고 있었다.
송부 촉탁에도 요리조리 빼더니 내 이럴 줄 알았다. 재빨리 휴대 전화를 꺼내 모니터 화면을 녹화했다.
'애매할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소송의 기본 원칙이다.
피고인의 증거는 판사의 심증을 살짝 흔들어 놓을 정도면 충분하다. 사건을 애매하게 만들어 놓으면 판사는 절대 유죄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러려면 상대방 진술의 신빙성을 깨야 하고, 우리 쪽 증거도 정황 증거만 있는 이상 상대방 진술의 허점을 파고들어야 했다.
그 허점을 찾으려고 서랍을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사무실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급히 책상 밑으로 뛰어듦과 동시에 남자의 경쾌한 말소리가 들렸다.
“손수현이 한 달 내로 네 침대에 뛰어든다는 데, 내 손에 든 양주를 걸겠어.”
“난 이미 네가 손수현하고 잤다는 데 걸도록 하지.”
“맹세코 안 잤어.”
“아직은 안 잔 거겠지.”
심드렁히 대꾸하며 남자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반질반질 빛나는 구두코가 눈앞에 있었다. 몸을 최대한 뒤로 물렸다.
“왜? 손수현 예쁘잖아. 걔도 손수현 꼬셔 보겠다고 여기 드나들다가 그 사달 난 거 아니야. 그러게 애새끼들이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데 말이지.”
“내 앞에서 잘도 그런 말이 나온다?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 있는데.”
“대신에 난 수임료 빵빵하게 주잖아. 서원 막내아들은 어떻게 빠져나올 가능성은 좀 있어?”
“없어도 되게 만들어야지.”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는 상대방에 비해 남자는 다소 건조하고 냉소적이었다.
책상에 가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셔츠가 팽팽히 당겨질 정도로 다부진 가슴과 느슨히 풀어진 넥타이만 보였다.
“다음 주에 시간 내서 사무실로 한번 나와. 증인 신문 연습하게.”
“여기서 하면 안 돼?”
“너보다 더 몸값 비싼 애들이야. 네가 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달칵, 라이터 켜는 소리가 나고 담배를 쥔 크고 길쭉한 손이 아래로 향했다.
“흐읍.”
순간 기침이 터질 거 같아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조그만 신음이 새어 나간 뒤였다.
멈칫한 남자가 몸을 뒤로 젖히고 슬쩍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공중에서 우리의 시선이 부딪쳤다.
나는 여전히 입을 틀어막은 채 눈만 치켜떠 남자를 응시했다.
불쑥 다가온 손이 내 턱을 틀어쥐고 우악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 탓에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고 민낯을 남자에게 내보였다.
남자의 칼날 같은 시선이 내게 내리꽂힌다.
“난 이상하게 법원 근처만 가면 심장이 벌렁거린단 말이야. 아무래도 그쪽 터하고 맞지 않는 게 틀림없어.”
혼자 주절거리던 사장은 뭔가 이상한 듯 말을 멈추었다.
“왜 그래? 거기 뭐 있어?”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나는 남자에게 절박한 눈빛을 보냈다. 사장이 바로 옆까지 다가왔을 때, 남자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러니까 죄 좀 작작 짓고 살지 그랬어.”
“승소율 높은 변호사가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아까 그 종업원 좀 데려와 봐.”
“왜?”
“진술서 받게.”
“다음에 한꺼번에 처리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지금 해야겠어.”
“알겠어.”
사장은 의아한 듯했으나 남자의 단호한 대답에 순순히 사무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고 잠시 후 남자가 말했다.
“나와.”
나는 책상 밑에서 기어 나와 지헌의 앞에 섰다. 단단한 지헌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웃기게도 나는 떨고 있었다. 긴장되고 어색한 나를 의식하자 숨이 더 가빠졌다. 땀이 밴 손으로 구겨진 옷을 펴고 머뭇머뭇 지헌에게 다가갔다.
“좀 놀랐어. 여기서 만날 줄 몰라서….”
뭐라고 말을 이으면 좋을지 몰라서 뒷말을 흐렸다. 언젠가 한 번쯤 만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의 만남이 갑작스러웠다.
“어처구니가 없군.”
먼지투성이인 내 꼴을 위아래로 훑어 내리며 지헌이 툭 내뱉었다. 그제야 지헌이 상대 쪽 변호사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난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건….”
“그래서 원하는 건 찾았어?”
더듬더듬 이어지는 말을 자르고 지헌이 직설적으로 치고 들어왔다. 나는 말문 막힌 얼굴로 지헌을 보았다.
“거기 대표님이 검사장 출신 이동우 변호사였나? 대표님께 연락 좀 드려야겠어. 신입들 교육 좀 잘 시키라고. 변호사가 이렇게 무단 침입 해서야 되겠어?”
담배를 물고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선 지헌에게는 칼자루를 쥔 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내가 증거를 찾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처럼 지헌 역시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였다.
무단 침입 한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순전히 지헌의 손에 달렸다. 갑자기 머리가 현실적으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현장 검증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나도 이렇게 나서지 않았어. 임박해서 준비 서면을 보내면 도대체 어쩌자는….”
발끈해서 소리치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고 사장과 바텐더가 들어왔다. 나는 급히 말을 멈추었다.
“홀 근무자는 퇴근하고 없는데… 근데 이분은 누구?”
의아해하는 사장과 ‘원하는 대로 상류층 남자를 꼬셨네요’ 하고 비아냥거리는 바텐더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지헌은 느긋이 내뱉었다.
“계속 말해 봐. 말 잘하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사장은 궁금한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지헌은 재미있다는 듯 난처해하는 나를 구경하다가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끄고 몸을 일으켰다.
“생각이 바뀌었어. 역시 다음에 해야겠어.”
그러고는 내 어깨를 움켜잡고 문가로 이끌었다.
“야, 이랬다저랬다 도대체 뭐야.”
떠나는 우리에게 사장이 황당한 듯 소리쳤다. 가게를 나오자마자 지헌은 어깨에 두른 팔을 풀고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말없이 쳐다보는 시선에서 나를 어떻게 처리할까, 재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잔뜩 긴장해서 지헌을 마주 보았다. 이윽고 결정을 내린 듯 지헌이 입을 열었다.
“의욕만 앞선 신입의 어설픈 현장 수사극 잘 봤어. 옛정을 봐서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주지.”
“…….”
“고맙단 말도 안 해?”
“…고맙게 생각해.”
예상치 못한 호의에 떨떠름한 대답을 내놓았다. 지헌은 짧게 되물었다.
“대가는?”
“무슨 의미야?”
“혹시나 예전처럼 몸으로 때워 줄까 싶어서 말이지.”
지헌이 싱긋 웃었다. 역시나, 싶으면서 순간 혹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제의도 반가울 정도로 사람의 체온을 느껴 본 지 오래되었다.
내가 단순히 지헌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사람의 체온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굳은 내 얼굴에 지헌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야. 너 놀리려고 그런 거야. 자꾸 그렇게 쳐다보니까.”
당황해서 시선을 내려뜨렸다. 내 눈빛에서 어떤 여지가 드러난 걸까. 지헌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근데 나라면 그 증거, 법원에 내지 않겠어. 알겠지만 어차피 위수증이라 증거력도 없을 테니까.”
그러곤 손목시계를 흘끔 확인했다.
“양쪽 변호사끼리 친분 있는 거 보여서 피차 좋을 거 없겠지. 법정에서 만나면 어련히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 믿어. 그럼 서로 바쁜 사람들이니 이만 헤어지도록 하지.”
“자, 잠깐.”
인사말을 던지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데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지헌의 슈트 자락을 붙잡았다.
돌아선 지헌은 붙잡힌 슈트를 한번 내려다보고 눈썹을 쓱 치켜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급히 제안했다.
“커피라도 한잔할래?”
그 말은 내 귀에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들렸다. 온통 얼굴로 피가 몰렸다. 무표정한 지헌은 뚫어질 듯 나를 응시했다.
우리는 말로 다 풀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고, 지금의 지헌이 내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지헌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우리에게는 어떤 마침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짧은 침묵 후 지헌이 입을 열었다.
“난 잠깐 사무실 들러야 하는데, 그럼 끝나고 우리 집으로 올래?”
“…어?”
갑작스러운 제안에 이번엔 내가 말을 잇지 못했다. 싫은 게 아니라 그저 잠시 놀랐을 뿐이었다. 입을 벌리고 멍하게 있자, 지헌이 가볍게 덧붙였다.
“주식 투기꾼 소송 맡고 있지? 관련 자료 줄게. 우리 로펌에서 맡으려고 알아보다가 생각보다 수월치 않을 것 같아서 손 뗀 거야.”
“어떻게 알았어?”
“이 바닥 좁잖아. 그 사람 꽤 애먹이지? 관련 자료 줄게. 도움 될 거야.”
“그래도 돼?”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지헌이 단순히 동문의 의리로 자료를 준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과거의 나는 사람의 인연을 우습게 보다가 큰코다쳤고, 목적 없이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 나이가 되었다.
아니,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이제 우리는 학생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사건을 수임하지 않았으므로 변호사법 위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뢰인의 자료를 타 로펌에 넘기는 행위는 도의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알 게 뭐야. 너만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르지.”
지헌이 비밀스럽게 웃었다. 서로의 치부이니 어디 가서 발설할 리도 없고, 우리 둘만 침묵하면 완전 범죄였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 범죄는 없다. 그걸 알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 이대로 지헌과 헤어지기 싫었다. 그깟 자료쯤 하나도 아쉽지 않다. 어차피 지금 로펌에서 승진은 글러 먹었고, 이미 망한 커리어에 패소 하나 더 얹어지는 것쯤 뭐가 대수일까.
자료 준다는 말에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지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너는 참 여전하다는 눈빛으로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신경을 건드렸다.
자료 때문에 지헌의 곁에 머물면서 지헌을 호구처럼 이용하던 과거의 기억이 회상되는 순간이다. 얼굴로 열이 몰려들었다.
“자료 때문이 아냐. 그냥 나는…!”
발끈해서 달려드는데 애써 그렇게 변명하는 스스로가 구차하게 느껴졌다.
“…됐어. 일 끝나고 연락해.”
결국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섰다.
지헌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내 말을 듣다가 입술을 휙 끌어 올렸다.
“이따 봐.”
그러곤 근사한 실루엣을 남기며 자신의 차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지헌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예전하고 비슷한 듯한데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변한 지헌의 모습이 어색한데 좋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하긴 내가 변한 만큼 지헌도 변했을 테니까. 다시 만나서 대화해 보면 차차 알 수 있겠지.
얼마 안 있어 지헌의 문자가 도착했다. 달랑 주소만 찍힌 문자에서 더는 네게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읽혔다. 씁쓸한 마음으로 문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꼭 지헌을 떠나야 했을까.'
지헌과 헤어지고 한 평짜리 고시원을 전전하며 틈만 나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상황에 떠밀려 지헌을 택했고, 거기에 내 의지는 없었다.
내가 지헌을 경계하고 배척할수록 지헌의 감정은 더욱 깊어졌고 내게 편집증적인 집착을 보였다.
영우와 있는 아파트까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쫓아온 지헌은 도저히 정상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지헌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병증 같다고 느꼈다. 이대로 지헌과 함께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 같았다.
나중에야 지헌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끝까지 내몬 것은 나였음을 깨달았다. 내 안에 쌓인 울분과 삐뚤어진 마음을 모조리 지헌에게 쏟아 냈고, 그게 지헌을 괴물로 만들었다.
지헌의 집은 지헌이 새로 이전한 로펌과 가까운 위치였다. 택시에서 내려 긴장한 얼굴로 휘황찬란한 고층 건물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예전에 지헌의 집에 처음 갔을 때도 이런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또다시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내 의지로 지헌에게 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경비원에게 신분 확인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올라탔다. 손에 살짝 땀이 나서 허벅지에 닦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갔다. 속이 울렁거려 안전 바를 지그시 잡고 침을 삼켰다.
땡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1층에서 연락을 받고 나와 있는 지헌이 보였다.
“들어와.”
“…….”
지헌은 문을 열고 가만히 나를 지켜보았다. 이후 행동은 전적으로 내 선택이었다. 과거에 지헌의 집에 들어갈 때처럼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 될지도 모른다.
형법에 미필적 고의라는 말이 있다. 결과를 예견하면서 하는 행위라는 의미였다. 지금 지헌의 집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면서 나는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쿵, 현관문이 무겁게 닫혔다. 집 안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황량했다.
예전에는 베란다에 자전거도 있고 벽에 서적들도 쌓아 둬서 편하게 흐트러진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모델 하우스처럼 생활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인테리어, 서적, 취미 생활 도구 같은 취향을 짐작할 만한 힌트가 전혀 없었다.
거실을 가볍게 둘러보고 창가에 다가섰다. 통유리 밖으로 한강이 내다보여 전망은 근사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갖춰 놓은 게 별로 없어. 잠만 자는 공간이라.”
현관 입구에 서서 지헌이 말했다. 조명을 역으로 받아 지헌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다시 만난 지헌은 내게 물음표였다.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 내가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지헌을 탐색하며 말을 골랐다.
“전망이 좋다. 아무것도 안 하고 여기서 차 한 잔 놓고 창밖만 바라봐도 좋을 것 같아.”
그 말에 지헌이 뚜벅뚜벅 다가와 내 옆에 섰다. 나는 괜히 긴장돼서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지헌은 처음으로 바깥 풍경을 눈여겨보는 것처럼 새삼스러운 눈으로 통유리창 너머 밤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런 지헌을 나는 조심스레 곁눈질했다. 브이넥 니트에 편하게 면바지를 입은 지헌은 체형이 좋아서 날렵한 핏을 자랑했다.
끝이 안 좋아서 영영 만나지 못할 것도 같았고, 그러면서 살면서 한 번쯤은 마주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했었는데, 눈앞에 있는 지헌이 마냥 신기했다.
“일은 할 만해?”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지헌이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너처럼 잘나가진 않아.”
“깊이 파고들어서 오래 걸렸다 뿐이지, 대학 때도 네 실력은 나쁘지 않았어. 티를 안 내서 네가 모를 뿐이지, 가끔 네 질문에 진땀 뺀 적도 많아.”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변호사로서 내 스텝은 이미 꼬였다.
비록 회사에서 내게 가망 없는 사건만 맡기더라도 부분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게 내 유일한 자부심이었는데, 지금은 그조차도 잘 모르겠다.
'진짜 내가 최선을 다한 걸까. 더 타협해서 법이 허용하는 한계까지 밀어붙였어야 했던 건 아닐까.'
내가 어려운 사건만 맡은 건 사실인데, 비슷한 케이스에서 지헌은 뒤집은 전적이 많았다.
요새는 진로 선택을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럴 때면 정지헌 생각이 났다.
한 번쯤 지헌을 만나 보고 싶은 이유였다.
나는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타이밍 좋게 지헌은 내게 담배를 내밀었다.
“…….”
잠시 멈칫했다. 사소한 행동에서 예전의 기억이 물밀듯 쏟아진다.
모의고사에서 모든 걸 다 쏟아붓고 학원 옥상에서 찬바람에 머리 식히며 담배를 피우거나, 시험에 대한 중압감으로 숨이 막힐 때마다 미친 듯이 몸을 섞고 나란히 침대에 누워 사이좋게 담배를 나눠 피운 기억들.
지헌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까.
담배에서 시선을 떼고 지헌의 얼굴을 보았다. 지헌은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 봐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순수하고 맹목적인 면이 있어서 얼굴에 감정이 곧잘 드러났는데, 지금은 너무 단단하게 다듬어졌다.
“끊었어.”
내 말에 지헌은 어깨를 으쓱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살짝 접으며 불을 붙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소한 행동에서 과거의 지헌을 발견하고 저런 모습은 그대로구나, 하고 반가워한다. 그리움도 아니고 도대체 이건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지헌은 불을 붙이느라 잠시 틈을 주고 말을 이었다.
“난 네가 검찰 쪽으로 빠질 줄 알았어.”
“공무원 월급으론 만족 못 해.”
“아, 최대한 돈 많이 버는 게 목표라고 했었지? 펑펑 쓰고 사는 게 소원이라고. 아직도 자기 전에 복권 당첨되는 상상 해?”
“뭐?”
“예전에 그랬잖아. 자기 전에 복권 당첨되는 상상 한다고.”
웃음기 가득한 말에 나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좀 잊어.”
생각해 보니 지헌에게 별 얘기를 다 한 것 같다. 유일하게 내 민낯을 드러낼 수 있는 상대였다.
내 모든 걸 받아 줘서 편했고, 지헌이 내게 집착하는 것 못지않게 나도 지헌을 의지하며 그 시절을 견뎌 냈다.
시험 기간 때 밤샘 공부 하다가 같이 벚꽃 피는 중도 앞에서 라면 먹은 기억, 맥주 마시면서 밤늦도록 정책을 놓고 토론했던 기억들, 그러다 알게 된 지헌의 학창 시절 추억들…. 생각해 보면 기분 좋았던 순간들도 더러 있긴 했다.
“그날 처음으로 네가 내 앞에서 옷을 벗은 날이라 못 잊을 거 같은데.”
지헌이 똑바로 내 눈을 주시했다. 내 얼굴에서 웃음이 사그라졌다.
지헌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서로의 호흡이 뒤섞이고 입술이 닿기 직전, 손에 있는 휴대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이상현 변호사였다. 지헌의 시선도 휴대 전화를 향했다. 전화는 끈질기게 울렸다.
퇴근하기 전 사무실에서 이상현 변호사에게 전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재중 전화를 보고 다시 전화한 모양이었다. 자정에 상사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의미심장했다.
“받아 봐.”
끈질기게 울리는 전화에 지헌이 턱짓으로 휴대 전화를 가리켰다. 급히 전원 버튼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
지헌은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헌의 시선을 피하며 새삼스레 집 안을 둘러보는 척 ‘집 좋네’ 중얼거리고 분위기를 환기하려 일부러 밝게 말했다.
“근데 나 커피 한잔 안 줄 거야?”
지헌이 눈을 내리깔고 나직이 말했다.
“글쎄. 우리가 오붓이 마주 앉아 커피 마실 사이이던가.”
멈칫해서 지헌을 보았다.
“뭐?”
“누가 들으면 작업 거는 줄 알겠어. 그런 말은 남자 꼬실 때나 쓰는 말이지.”
비아냥거리는 말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나는, 우리가 어떤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대화? 무슨 대화?”
지헌은 냉랭하게 웃었다.
“모르겠어. 나 사실 너한테 할 말이 되게 많았는데 잘 생각이 안 나.”
나는 복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연수원 시절부터 고개를 들면 항상 이정표처럼 네가 보였어. 어느 순간 난 네 발자국을 따라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 어쨌든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던 사람이니까. 그냥 한 번쯤 너를 만나고 싶었어.”
“감동적이네. 확실히 네 목표가 되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했던 시절이 있긴 했지.”
지헌이 입술 끝을 비틀어 웃었다.
“난 네가 나랑 같은 생각인 줄 알았어. 대화할 생각 없으면 난 갈게.”
얼굴을 굳히며 돌아서는데 뒤에서 돌변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비싸게 굴 거 없잖아. 서로 질리도록 해 본 사이에 뭘 인제 와서 내외야? 내가 널 몰라? 너도 이런 거 예상하고 온 거잖아.”
돌아서서 지헌을 보았다. 예의를 걷어 낸 지헌은 성욕이 차오른 눈동자로 느긋하게 나를 훑어 내렸다.
“아무래도 나 오늘 여기 잘못 온 거 같다.”
허탈하게 중얼거리고 돌아서는데, 지헌이 탁자에 있는 서류 뭉치를 들어 툭, 내 발치에 던졌다. 모욕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주식 투기꾼 소송 관련 자료야. 이거 갖고 이번 클럽 사건에서는 손 떼.”
“…….”
“괜히 힘 빼지 말라고.”
이제야 지헌의 의도를 알겠다. 다시 만난 감상에 젖어 있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발밑의 서류 뭉치를 보다가 시선을 들어 지헌을 보았다.
“…우리 쪽 의뢰인이 죽인 거 아니구나.”
단정 짓는 말에 지헌은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죽인 게 중요한가.”
누가 죽였든 어차피 우리는 의뢰인 이익을 대신하는 사람들이었다. 새삼스러운 확인 사살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지헌은 별안간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넌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
“예전에는 네가 어려웠어. 날 이용하고 싶어 하면서 자존심 때문에 힘들어하는 네가,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어. 너보다 앞서가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내 착각이었지. 대단한 네 자존심을 간과한 게 내 실수였어.”
“…….”
“넌 여전히 갈등하는구나.”
내가 가진 고민을 지헌은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대중이 경멸하는 인간을 변호하는 것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고, 어디까지 밀어붙여야 하는지, 애매모호한 영역 안에서 고민될 때마다 정지헌 생각이 났다. 너는 뭐든지 다 아는 백과사전 같은 인물이니까 이럴 때 뭐라고 할까. 지헌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 때였다. 벨 소리가 울렸다. 지헌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예정된 방문자라는 뜻이었다.
“저녁 안 먹었죠? 그럴 줄 알고 도시락….”
여자는 지헌에게 말을 걸며 자연스럽게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 멈칫했다. 지헌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 내가 타이밍 잘못 맞췄나?”
“아니야. 얘기 다 끝났어.”
지헌은 여자를 안쪽으로 안내하고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노골적으로 나가 줄 것을 요구했다.
“나가는 길 알지? 보시다시피 손님이 와서 배웅은 못 해.”
“…….”
“식탁에 차려 놓고 있어. 곧 들어갈게.”
지헌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여자에게 말했다. 아니, 여자에게 하는 말이지만 결국은 나를 겨냥한 말이었다.
내게 모욕감을 주고, 이제 너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나는 묘한 얼굴로 지헌을 보았다. 나를 배척하는 지헌이 왜 당황스러운 것일까. 그제야 번득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쳤다.
내 자의로 지헌과 헤어지긴 했지만, 언제든 내가 손을 내밀면 받아 줄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기억 속 지헌은 깊고 뜨거운 집착을 내게 퍼부었고 언제나 절절했다. 단 한 번도 지헌이 나를 거절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나면서 기분이 묘했다.
“야, 여기는 주차할 때 간 떨리게 외제 차가 왜 이리 많냐. 어라… 현관문이 왜 열려 있어.”
긴장된 분위기를 깨고 남자 한 명이 호들갑스럽게 들어왔다. 그는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 멈칫하더니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지헌을 보았다.
“어… 이거 무슨 분위기지?”
부엌에 있던 여자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남자에게 뭐라고 눈치를 주었다. 남자는 무언의 지시를 알아듣고 거실로 조용히 들어서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나 쟤 얼굴이 되게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빛을 등지고 선 지헌은 문 앞에 선 내게 나직이 말했다.
“힘들면 자문 변호사로 물러나도 돼. 포기하는 것도 용기라고 생각해.”
“잠깐, 쟤 대학 때 걔 아냐?”
닫히는 문 사이로 남자의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발걸음을 떼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으로 계속되는 야근으로 피곤이 누적돼 붉게 충혈된 눈을 한 여자가 보였다.
자문 변호사로 물러나도 된다는 말은 도리어 내 승부욕을 자극했다. 새삼 잊고 지냈던 대학 때 기억이 떠오르면서 정지헌과 제대로 붙어 보고 싶다는 투지가 끓어올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생동감이었다.
첫 번째 기일 날, 이상현 변호사와 함께 법원에 출석했다.
재판 직전에 이상현 변호사로 담당 변호사가 바뀌었고, 처음부터 어소로 참여해서 사건을 꿰고 있던 내가 시종일관 이 변호사 옆에 붙어서 서포트해 주었다.
그런데도 이 변호사는 법정에서 버벅대고 증거 신청 기간을 착각해서 판사에게 한 소리 들었다.
휴식 시간, 나는 이 변호사와 함께 법원 공실로 이동했다.
법원 공실은 정지헌네 로펌에서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후에 있을 다른 의뢰인들 재판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지헌 옆에는 그날 밤에 본 여자도 함께 있었다. 여자가 먼저 나를 알아본 눈치였다. 지헌에게 살짝 귓속말을 하며 우리 쪽을 가리켰다.
서류에 집중하고 있던 지헌은 나와 이 변호사를 차례로 훑어보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어이쿠, 일찍 오셨네요.”
옆에서 이 변호사가 급히 마주 인사했다. 굽실대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보란 듯이 인사하는 둘을 냉랭히 지나쳤다. 그러곤 자리에 앉아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이 변호사는 찬바람 쌩쌩 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우물쭈물 서 있다가 내 옆에 따라 앉았다.
이 변호사에게 사건 요지를 다시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신경은 온통 정지헌에게 쏠려 있었다.
“내가 이런 사건 한두 번 해 본 게 아냐. 이 정도는 문제없다고. 다 끝났으면 우리 커피 한잔 마실까? 아메리카노 좋아하지? 기다려 봐.”
이 변호사는 큰소리치고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정지헌의 책상을 쳤고, 서류 더미가 바닥에 후두두 떨어졌다. 이 변호사는 연신 죄송하다고 중얼거리며 서류를 주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