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 2부 - 4
“최 변호사 오늘 원피스 입고 왔네. 소개팅 있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친분 있는 여자 회계사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아니요. 그냥 한번 입어 봤어요. 괜찮아요?”
“응, 예뻐. 평상시에도 그렇게 입고 다니지. 보기 좋잖아.”
“네. 그럴게요.”
“근데 추워? 날 따듯한데 왜 목을 스카프로 돌돌 감았어. 그러고 보니 목도 좀 쉰 것 같은데.”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조심해. 환절기에 감기 많이 걸리잖아.”
“네.”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스카프를 매만졌다.
맞은편 엘리베이터 문에는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은 내 모습이 비쳤다.
직업 특성상 노출을 지양하고 무채색 옷을 즐겨 입었다. 평소와 다른 스타일로 치장한 내 모습이 어색했다.
남자의 시선을 끌려면 어떡해야 하는 걸까. 그런 고민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가는 와중에도 몇 명에게서 오늘 예쁘다는 말을 인사치레로 전해 들었다.
예전이라면 그냥 흘려들었을 말들이 지금은 진심처럼 느껴졌다.
회의실에는 이미 몇 명의 변호사들이 모여 있었다. 서류를 검토하던 지헌은 무심코 나를 확인하고 시선을 내리다가 다시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뭐.”
나는 모른 척 왜 그러느냐고 묻고는 의자를 빼서 앉았다. 탐탁지 않은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 내린 지헌은 시비를 걸었다.
“오늘 선보러 가?”
“그냥 예쁘다고 말해.”
“솔직히 말해 줄까?”
“언제부터 예의를 차렸다고.”
커피 잔을 입에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지헌은 다른 사람들이 못 듣게 슬쩍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입술이 왜 그렇게 빨개. 아랫구멍 같아서 박고 싶잖아.”
“…….”
나는 김이 샌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요새 아침 출근 시간이 길어졌다. 공들여 화장하고 옷도 지헌의 취향대로 고심해서 골라 입었다. 그러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정지헌 스케줄을 확인했다.
같이 회의가 겹치는 날은 신경 쓰여서 일이 손에 안 잡혔다.
근데 좋아하면 뭐 해. 저렇게 미운 소리만 골라 해 대고, 만나 봤자 싸우기만 하는데.
간혹 날 농락하려고 옆에 두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애가 삐딱했다.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고, 보면 짜증 나고.
건너편에 앉은 박선호는 지헌과 나의 신경전을 곱게 보아 넘겼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눈에 불을 켜고 지헌의 옆에 앉은 나를 견제하면서 회의 시간 내내 괴롭혔을 텐데, 승아 언니에게 당하는 걸 본 뒤로 내게 마음이 너그러웠다.
거기에는 지헌이 다른 여자와 잘 만나고 있다는 착각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 나를 짠한 눈으로 쳐다보는 걸 보면 말이다.
각 전략의 장단점에 관한 토론이 길게 이어져 회의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내가 직접 어소로 참여하는 사건은 아니어서 부담이 덜했다. 발표하는 인턴을 진지하게 쳐다보면서 어젯밤 야근하다가 회의실 탁자 위에서 지헌과 섹스한 기억을 떠올렸다.
내게 관심 없는 지헌을 도발해 관계한 그날 이후로 지헌은 툭하면 나를 사무실로 불러냈다. 점심시간에, 혹은 야근하다가 사무실 벨이 울리면 지헌의 사무실로 불려 갔다. 끝나고 나면 가끔 늦은 식사를 함께 나눠 먹기도 했다.
지헌의 앞에서 울면서 고백한 이후, 지헌은 나에 대한 편견을 벗어던진 것 같았고, 나도 지헌에게 조금 더 솔직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제는 지헌의 사무실 코드가 뜬 전화벨이 울리면 스스로 들뜨는 마음이 느껴졌다. 가기 전에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 사유는 인정받기도 어렵고 입증도 쉽지 않겠는데.”
중얼거린 지헌은 노트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렸다.
나는 필기하는 지헌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길고 곱지만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은 남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저 손으로 내 몸을 움켜쥐고 강하게 밀고 들어온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어서 건장한 팔과 팽팽히 당겨진 셔츠 가슴팍이 눈에 들어오고, 뚫어질 듯 나를 응시하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
순간 온몸이 긴장돼 손안에 쥔 볼펜을 꽉 움켜쥐었다.
지헌의 시선에 평범한 사무실 공간이 야하게 느껴지고 애무 없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미친 게 틀림없다.
회의 내내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다가 정리하는 소리에 나도 다이어리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변호사와 대화를 나누던 지헌은 나를 흘끔 쳐다보며 손가락을 아래로 까닥였다.
‘넌 잠깐 남아.’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서다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와이셔츠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린 지헌은 진지한 얼굴로 대화에 집중했다. 대학 때부터 늘 보던 얼굴이라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떨어져서 바라보니 새삼 잘생겼다는 걸 알겠다.
우리가 대학 때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파트너와 신입 변호사로 처음 만났더라면 지금처럼 엉망진창으로 꼬이진 않았을 텐데.
이제는 지헌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반대로 말하면 세월이 흐르고 내가 변했듯이 지헌도 변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참담했다.
“안 가고 뭐 해?”
나가려던 박선호가 내게 다가왔다. 지헌과 같이 회의실에 남아 있는 내가 거슬린 듯했다. 별로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아서 대화 중인 지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박선호는 미심쩍은 눈으로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뭘 그렇게 봐.”
예의상 쓰던 존댓말도 이제는 집어치웠다. 박선호도 반말하는 나를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너 요새 좀 수상하다.”
“미치겠다, 진짜.”
지긋지긋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다.
“지헌이 만나는 여자 있는 거 알지? 요새 지헌이 연애한다고 바쁜 모양인데 괜히 훼방 놓을 생각 하지 마라. 그래 봤자 너만 힘들어.”
박선호는 제법 나를 위하는 얼굴로 타일렀다.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막 이성에 눈뜬 10대처럼 툭하면 사무실로 날 불러내서 뒹굴었던 걸 알면 표정 한번 볼만하겠네.
“알았으니까 그만 가.”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미소에 박선호는 더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너 요새 지헌이 사무실을 너무 네 집 안방처럼 자주 드나드는 것 같은데 그러다 소문 잘못 나면 서로 곤란하니까 자제 좀 해.”
네 집 안방? 정색하고 박선호를 쳐다보았다.
“박선호 변호사님. 자꾸 나한테 이러면 정지헌이 좋아할까요? 승진하셔야죠. 언제까지 정지헌 믿고 버티실 거예요?”
“뭐? 야, 너 말이면 단 줄 알아!”
대놓고 자존심 긁는 말에 박선호가 빽 소리쳤다. 남아 있는 몇몇 변호사들 시선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지헌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우리에게 다가와 차례로 힘주어 노려보았다.
“너 진짜 내가, 하여튼 너 나중에 두고 봐.”
박선호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협박을 날리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모양 빠지게 퇴장하는 박선호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박선호는 정지헌 뒤에 숨어서 내게 소리 없는 욕설을 보냈다.
“적당히 해라.”
끝나지 않은 신경전에 지헌이 나지막이 경고하며 들고 있던 서류를 툭 내 앞에 놓았다.
“아까 회의 들었지? 너도 노위6)에 갔다 와.”
“내가 왜? 노무사들 보내.”
어깨를 으쓱이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아까 회의 못 들었어? 클라이언트가 변호사도 원하잖아.”
“그럼 바로 법원을 가지, 왜 노위를 가.”
한심하단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눈빛이었다.
“노위를 거쳐야 법원을 가지.”
노사 문제 특성상 노위를 한번 거쳐야 법원으로 갈 수 있는 사건들이 많았다. 실무에서는 주로 민소만 써먹다 보니 노동법이 가물가물했다.
“아 참, 그렇지.”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답했다.
“노동법은 선택 과목이라 전략적으로 포기했거든.”
선택 과목은 과락만 면하는 전략이라 사실 제대로 공부한 게 없었다. 지헌은 그게 자랑이냐고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게 불만이면 민소 말아먹고 다른 과목 대박 난 박선호 변호사님을 보내시든가요.”
박선호가 민소 말아먹고 다른 과목 대박 나서 합격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래서 송무 실력도 개판이었고, 그나마 정지헌 백으로 회사에서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정지헌이나 박선호 앞에서 그걸 대놓고 얘기하는 간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지헌 머리 위로 모락모락 솟아나는 연기가 보이는 것 같다. 지헌은 후, 하고 짧게 숨을 내쉬고 잇새로 지그시 내뱉었다.
“그래, 가서 그렇게 또박또박 말대꾸해서 임원들 열받게 만들라고.”
“네, 하라면 해야죠. 파트너님 명령이신데.”
냉큼 대답하고 탁탁 서류를 소리 나게 챙겨 일어섰다.
“나 이렇게 열받게 하고 가긴 어딜 가.”
머리도 열받아 보이고 반쯤 솟은 성기는 더욱 열받아 보였다. 지헌은 다리 사이로 내 손을 이끌었다.
내 손 아래서 지헌의 성기는 더욱 뜨겁게 요동쳤다.
빨간 입술이 아랫구멍 같고 어쩌고 할 때부터 지헌의 눈빛은 끈적였다. 몸이 달아오른 상태로 날 옆에 앉혀 두고 용케 회의는 진행했다.
“아침부터 참 힘도 좋아.”
비웃는 말에 지헌이 슬쩍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칭찬 고마워.”
그러곤 내게 몸을 겹쳐 왔다.
“하지 마. 오늘 너 별로야.”
다가오는 지헌을 밀어내고 고개를 틀었다. 잠시 멈칫한 지헌은 보란 듯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몸을 더듬었다.
“싫다고 했잖아.”
순간 지헌의 눈이 반짝였다. 도리질 치는 내 턱을 움켜잡고 억지로 입술을 맞붙였다.
“으, 으읍!”
반항할수록 입 속에서 지헌의 혀는 더욱 거칠게 움직였다. 뒷머리를 누르고 격렬하게 혀를 빨아 댔다.
격렬한 싸움 끝에 입술을 내어 주었다. 그러자 지헌도 한결 누그러진 자세로 끈적하게 혀를 비벼대고 놓아주었다.
숨을 헐떡이며 지헌을 노려보았다. 지헌은 부어오른 입술을 더듬으며 눈을 맞추었다.
“누구는 네가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나도 너 별로야. 그러니 너도 참아. 그래야 서로 공평하지.”
탁, 하고 지헌의 손길을 거둬 내고 손등으로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지헌은 그 정도는 봐준다는 듯 너그럽게 웃어넘겼다.
이 정도로 질색하는 게 우스울 정도로 지헌과는 수도 없이 뒹군 사이였다.
가끔은 나에게 복수하려고 옆에 두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벗어날 용기도 없으면서.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헌을 쏘아보는 게 전부였다. 지헌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의자에 앉아 느긋이 성기를 쑤셔 넣고 지퍼를 채웠다.
“끝나고 호텔로 와. 펜트하우스에서 법조인 행사가 있어.”
“내가 거길 왜 가.”
그런 큰 행사에 끼어들 연차는 아니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
“네가 내 오피스 와이프잖아.”
뻔뻔한 대답에 기가 차서 고개를 젓고 돌아섰다.
벌컥 문을 열자 놀란 박선호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앞에 바짝 귀를 대고 쪼그려 앉아 있는 모양새가 한심했다.
박선호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을 늘어놓는다.
“나 막 들어가려고 한 거다. 절대 엿들으려고 한 거 아니야.”
이놈이나 저놈이나.
등신처럼 서 있는 박선호를 사무실 안으로 툭 떠다밀었다. 박선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착각한 거 아냐? 네 오피스 와이프 여기 있네.”
동시에 구겨지는 정지헌과 박선호 표정을 보며 확실히 문까지 닫아 주었다.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그 아래서 은은한 첼로 선율이 울려 퍼졌다.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열린 소규모 파티에는 각종 법조계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고상하게 샴페인 잔을 홀짝이며 실내악 공연을 감상했다.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으며 휴대 전화를 꺼내었다. 클라이언트 미팅 후 도착한다던 지헌은 소식이 없었다.
“쟤 최미희 아냐?”
“여기가 어디라고 와. 완전 뻔뻔하다.”
“혼자 온 거야? 옆에 남자 있나 봐 봐.”
한쪽 테이블에 모인 법대 동기들은 연신 나를 흘끔거리며 수군거렸다.
“신경 쓰지 마. 그냥 남의 일 말하기 좋아하는 애들이야.”
옆에 선 박선호가 나직이 말했다. 나는 어이없는 시선을 박선호에게 보냈다. 자기가 제일 앞장서서 구박할 때는 언제고 이건 또 무슨 심리람.
“왜?”
박선호가 왜 그렇게 보느냐며 영문 모를 얼굴을 했다.
“징그럽게 왜 이래. 한 가지만 해.”
통박 놓는 말에 박선호는 눈을 샐쭉 뜨고 나를 흘겨보았다.
“편들어 줘도 지랄이야.”
황당해서 박선호를 쳐다보다가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만 보면 싸우다 정드는 사람은 정지헌이 아니라 박선호 같기도 하다.
“쟤 설마 박선호까지 꼬드긴 거야?”
“와, 대단하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대화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내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저것들이 진짜.”
주먹을 움켜쥔 박선호가 몸을 틀어 동기들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수군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박선호는 짜증스러운 듯 내게 물었다.
“정지헌 언제 온대.”
“오피스 와이프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말을 해도 진짜.”
박선호는 나를 한번 째려보고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지헌이는 도대체 왜 널 여기로 부른 건지 모르겠다.”
그러더니 문득 초조한 눈길을 내게 보냈다.
“근데 너 진짜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설마 지헌이 결혼하고도 계속 있을 건 아니지? 옮길 곳이 적당치 않으면 괜찮은 로펌 있나 내가 한번 알아봐 줘?”
요즈음 지헌과 나와의 관계를 박선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걸까. 다른 때와 다르게 장난기 싹 빠진 진지한 모습이었다.
“사귀다 헤어진 사람들끼리 같이 일하면 안 돼?”
그 말에 황당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지헌이 결혼하는 걸 네가 보겠다고? 언제까지? 걔가 애 낳아서 돌잔치 하면 너 거기도 갈래? 그게 뭐 하는 짓이야.”
정지헌 옆에 있는 미지의 여자와 그 둘 사이의 아이가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순간 치솟는 격렬한 질투심에 손안의 샴페인 잔을 꽉 움켜잡았다. 나를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정지헌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 같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적반하장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머리가 뜨거울 정도로 질투심이 솟구쳤다.
“거봐. 너도 그건 아니다 싶지? 그러니까 네가 이직해. 너 영업은 별로지? 그럼 차라리 공기업은 어때? 최근에 그쪽으로 이직한 선배는 여유 있다고 만족해하더라.”
새카맣게 가라앉은 내 시선을 모르고 박선호가 나를 생각해 주는 척 회유했다. 나는 박선호 말을 끊고 차갑게 물었다.
“그럼, 너도 오지은 씨하고 헤어지면 이직할 거야?”
돌려진 화살에 박선호는 무척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뭐? 너 그건 어떻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너희랑 같냐. 너희가 어디 보통 사귀다 헤어진 사이야.”
보통이 아닌 사이라는 말이 가슴에 파고든다. 떨어져 있던 기간에도 지헌은 내게 영향을 끼쳤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한시도 지헌을 잊은 적이 없었다.
뭔가 말할 듯하던 박선호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최 변호사, 오랜만이네.”
이상현 변호사가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이상현 변호사에게 짧게 묵례한 박선호는 다음에 얘기하자고 내게 눈짓하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네, 오랜만에 봬요. 대표님도 같이 오셨어요?”
“일이 있으시다고 해서 내가 대신 참석했어. 근데 정지헌 변호사는 안 보이네?”
“미팅이 있어서 조금 늦나 봐요.”
나도 모르게 무심코 인사하다가 지헌을 도발하려고 자정에 이상현 변호사에게 전화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이상현 변호사는 그때 일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옆에 있는 사람을 내게 소개했다.
“여기는 판사로 계시다가 이번에 새로 오신 유기철 변호사님. 미희 씨도 잘 알지? 인사드려.”
안경을 쓴 푸근한 인상의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판사들 사이에서 서면 잘 쓰는 변호사로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남자의 손을 맞잡으며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연수원에서 공부할 때 판사님 판례로 스터디 많이 했어요. 특강 나오실 때도 뵌 적 있고요. 무척 인상 깊은 강의였어요.”
남자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판례 쓰기를 주제로 몇 번 연수원에 특강 나온 적이 있었다. 개정된 법 관련으로 강의하는 타 강사들과 비교하면 현저히 인기도는 떨어지는 수업이었다. 예비 법조인들이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을 이해할 필요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남자를 좋게 보았다. 고리타분한 세계에서 저런 특이한 인물은 흥미로웠다.
“인상 깊었다니 제가 더 감사한데요. 연수원에서는 다시는 불러 주지 않더군요.”
남자가 소탈하게 웃었다.
겉모습은 저래 봬도 법정에서는 카리스마가 넘쳐 났다. 같은 로펌에 있었다면 배울 점이 많았을 텐데 꽤 아쉬웠다. 남자가 샴페인을 들이켜며 물었다.
“이재국이라고 알아요? 아마 연수원 한 기수 선배일 텐데.”
“글쎄요. 같은 반 아니면 워낙 교류가 없어서요.”
“하긴 그렇긴 하죠. 그러고 보니 정 대표가 나랑 연수원 동기인데, 정지헌 변호사하고도 잘 알겠네요. 법대 동기 맞지요.”
확신을 두고 던진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지헌과 친분이 있는 사이라는 게 대외적으로 알려져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긴 한데… 제가 중간에 전과로 들어와서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에요.”
“그래요? 같은 학회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학교 다닐 때는 별로 안 친했어요.”
“안 친하긴. 우리 친했잖아.”
뒤에서 불쑥 손이 뻗어 와 내 어깨를 감쌌다. 옆에 선 지헌이 나를 바짝 끌어당기며 웃었다.
유기철 변호사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와 정지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경고하는 시선을 지헌에게 보냈다.
“왜? 할 말 있어?”
지헌은 모르는 척 뻔뻔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지그시 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언제 왔어?”
“네가 이상현 변호사와 사이좋게 이야기 나눌 때부터?”
“…….”
지헌은 내게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이곤 유기철 변호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게 누구야. 이런 곳에는 절대 발도 안 들인다더니?”
놀리듯 하는 말에 유기철 변호사는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법학회 행사에 도대체 실내악 공연은 왜 하는 거야?”
내심 궁금했던 질문에 나도 정지헌을 주목했다.
“그냥 있어 보이는 척하는 거지, 뭐.”
장난스러운 대답에 유기철 변호사와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헌은 내 손에 든 샴페인 잔을 빼앗아 입가에 가져가며 어깨를 으쓱였다.
“보이는 껍데기가 중요한 사람들이잖아.”
지헌의 어조에는 왠지 모를 비웃음이 배어 있었다. 모임에서 감투를 쓰고 있는 거로 아는데, 껍데기가 중요한 사람 중 핵심 인물이면서 우습게 여기는 게 신기했다.
막역한 사이인지 이후로도 둘 사이에는 편한 말들이 오고 갔다.
대화하는 내내 지헌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내 어깨를 감싸거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눈에 띄는 스킨십을 했다.
멀리 있던 박선호가 눈에 힘을 주며 내게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 한쪽 테이블에 모인 법대 동기들도 놀란 얼굴로 나와 지헌을 연신 흘끔거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들을 지헌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다. 이후에도 나를 옆에 끼고 홀을 누비고 다니면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어깨에서 손 내려.”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사람들 눈을 피해 잔뜩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나 노려보는 시어머니들 좀 봐.”
“아직도 사람들 시선이 무서워?”
“귀찮으니까 그렇지.”
시큰둥하게 답하고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문이 열리고 낯이 익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가 무슨 말인가를 듣고 놀란 얼굴로 지헌과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중에는 다은이와 승아 언니도 있었다. 나를 본 다은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순 묘한 정적이 흘렀다.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책임을 떠넘기듯 지헌을 쳐다보았다. 지헌은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너 이런 자리인 거 알고 일부러 나 부른 거지.”
“내가 왜?”
“나 엿 먹이려고.”
“글쎄.”
“이 못된 놈아. 너 아까 일 복수하는 거지?”
“무슨 일?”
하고 되물은 지헌은 뒤늦게 떠올린 듯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아, 그 오피스 와이프?”
그러더니 돌연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박선호가 나만 믿고 회사에서 버티는 것 같아?”
침묵으로 긍정했다.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 모두가 아는 비밀이었다. 지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번에 의료 소송 박선호가 물고 온 거야. 박선호가 불만이면 네가 더 큰 의뢰인 데려와. 그럼 돼.”
뻔뻔하게 내뱉는 말에 나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그게 온전히 박선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어? 네 인맥으로 박선호에게 소스를 줬겠지.”
“나한테서 정보 가져간 것도 박선호 능력이야.”
“그러니까 네 오피스 와이프는 박선호인 걸로 하자. 나도 못 한 일을 박선호는 해냈잖아.”
정지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정색하던 지헌은 돌연 입술 끝을 비틀어 웃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박선호가 부러우면 너도 날 이용하라고. 너 잘하는 짓 있잖아. 베갯머리송사.”
이번에는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나는 샴페인 잔을 들어 정지헌 잔에 짠, 하고 부딪치며 이 사이로 낮게 말했다.
“쓸데없는 충고 고마워.”
“그래, 얼마든지 긁어 봐. 그래 봤자 매일 밤 내 아래 깔리는 건 너니까. 난 가끔 네가 마조히스트 아닌가 싶어. 날 자극해서 달려들게 하잖아.”
그러곤 내게 시선을 박고 샴페인 잔을 쭉 들이켰다.
“뭐 해, 너도 마셔.”
단숨에 잔을 비운 지헌은 내 잔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나도 지헌을 노려보며 샴페인을 입가에 가져갔다.
“곧 의원님 오실 거야. 준비하고 있어.”
냉랭한 분위기를 깨고 승아 언니가 끼어들었다. 지헌에게 나직이 말한 언니는 옆에 선 내가 거슬린 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넌 자주 보네?”
“그러게요.”
“반갑다고는 말 못 하겠다.”
“저도요.”
“새끼 변호사가 낄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 좀 비켜 줄래?”
박선호는 뒤에서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우리를 지켜보았다. 지헌은 흥미롭게 사태를 관망했다.
나는 지헌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승아 언니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넌 좋겠다? 저렇게 편드는 사람이 많아서.”
그러곤 지헌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저거 진짜 또라이 아냐!”
뒤에서 분통 터진 듯 외치는 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헌이 뭐라고 답하는 듯했으나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초면인 여자가 친근하게 인사해 왔다. 한적한 파우더 룸에는 여자와 나뿐이었다. 별다른 대꾸 없이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학교에서 뵌 적 있어요.”
“아, 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타월을 뽑아 젖은 손을 닦았다.
“모의재판에서 검사 역할 하셨잖아요. 되게 인상 깊었거든요.”
잠시 멈칫했다.
오래전, 문 두드리는 스터디마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궁여지책으로 들어간 학회에서 한 활동이었다.
“그래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휴지를 쓰레기통에 넣으며 가볍게 답했다. 파운데이션을 꺼낸 여자는 퍼프를 얼굴에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네, 검사 되실 줄 알았어요. 되게 잘하셨는데.”
“글쎄요.”
적당히 대꾸하며 웃었다.
언젠가 지헌에게도 같은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내 적성을 남들이 잘만 찾아 줬다. 로펌에 있다가 피곤해지면 진짜 공직으로 가 봐야 하나. 대중없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근데 그 로펌에서 일하기 좀 그렇지 않아요?”
“뭐가요?”
“정지헌 변호사하고 사귀었잖아요.”
거울 속으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싱긋 웃으며 파운데이션 뚜껑을 닫았다.
“박창섭 의원님 딸이 제 친구예요. 아시죠? 정지헌 변호사하고 이번에 약혼할 거거든요.”
어쩐지 묘한 악의가 느껴지더라니. 나는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요?”
“초면에 이런 얘기 해서 죄송한데….”
“죄송하면 하지 마.”
무심히 여자의 말을 잘랐다. 여자가 발끈해서 외쳤다.
“둘이 오래전에 끝난 사이로 알고 있어요. 학교가 떠들썩하게 헤어지셨더군요. 그래 놓고 왜 인제 와서 깽판이에요? 정지헌 씨 변한 거, 당신 때문 아닌가요?”
여자는 막 대학을 졸업한 듯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친구라니까 정지헌 약혼자도 비슷한 나이대겠지. 되게 어린 애랑 만났네.
“나도 이제 좋은 집안에서 사랑만 듬뿍 받고 자란 여자 한번 만나 보려고.”
지헌의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다. 하얀 목덜미에는 얼룩덜룩 열꽃이 피어 있다. 지난밤 지헌이 내게 남긴 흔적이었다.
“이게 나 혼자 깽판 친 거로 보여?”
놀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를 뒤로하고 파우더 룸을 빠져나왔다.
요새 들어 정지헌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나를 감시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젯밤에도 정지헌 약혼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 전화는 나를 자극했고, 나는 지헌을 자극해 발정 난 짐승처럼 내게 달려들게 하였다.
그들도 지헌의 변화를 느끼고 발악하는 듯했다.
좁은 통로를 중간쯤 빠져나왔을 때였다.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고 뒤이어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사이에 우뚝 선 지헌이 보였다. 지헌의 발치에는 남자 한 명이 쓰러져 뒹굴었다.
클래식한 음악이 흐르던 공간은 순식간에 시장 바닥처럼 변했다. 놀라서 다가서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흘깃거리며 길을 터 주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헐떡였다.
“어디 더 지껄여 봐, 응?”
지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졌다.
“그만, 이제 그만해.”
박선호가 지헌을 붙잡고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나를 흘끔거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직원이 안내해 준 객실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흥분한 여자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미희 걔, 그냥 너 가지고 노는 거야. 사람 가지고 노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걔는 그냥 남 흔드는 걸 즐기는 거야. 상대방 뒤흔드는 것에 짜릿함을 느끼는 거라고!”
잠시 후 나직한 지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 상관없어.”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승아 언니는 분통 터진 듯 쾅, 하고 문을 닫고 나왔다. 언니는 복도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서슬 퍼렇게 노려보고 스쳐 갔다.
그 뒤를 따라 나오던 박선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내 옆에 섰다.
“종우 선배라고 대학 때부터 좀 질이 안 좋았어. 네 욕 하다가 마침 지헌이한테 딱 걸렸지 뭐. 대학 때야 뭘 몰라서 그런다지만 인간이 아직도 저러고 사네.”
“…….”
“누나는 지헌이가 자꾸 네 일로 엮이는 게 화가 나서 그래.”
“알아. 다들 눈 부릅뜨고 나 감시하려고 하는 거.”
“우리가 괜히 그러는 줄 알아? 승아 누나 아직도 집안 모임 때 큰집을 못 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눈빛에 박선호가 화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희 사귈 때 지헌이 부탁으로 집안 어른들 마음 돌리려고 애쓴 모양인데, 너희 헤어지고 승아 누나 욕 무지 먹었어. 지헌이 어머니는 승아 누나가 너희들 소개해 준 줄 알았나 봐. 따지고 보면 승아 누나도 너희 잘되게 집안 어른들 설득시킨 죄도 있고 뭐 이래저래 아직 큰집을 못 간다더라.”
“…….”
“그러니까 네가 이직해. 넌 우리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둘이서 언제까지 이럴 거야. 난 도대체 네가 지헌이하고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정지헌하고 너하고 공통점이 있는데 그게 뭔 줄 알아?”
“공통점? 그게 뭔데?”
“둘 다 쓸데없는 충고를 잘한다는 거야. 나한테는 승아 언니 입장 대변해 주고, 승아 언니에게는 내 편 들어 주는 거 알고 있어. 너야말로 노선 확실히 하지 그래.”
박선호는 허를 찔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대로 박선호를 지나쳐 객실 문을 열었다. 무심코 발을 옮기다가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멈칫했다.
다은이가 스스럼없이 지헌을 어루만지며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전해지는 친밀한 분위기가 신경을 건드렸다. 기억으로 분명 둘은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내가 없는 시간 동안 둘 사이에 어떤 서사가 있었을까. 상상만 해도 치솟는 불쾌감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몰랐어? 둘이 아마 사귀었을걸? 다은이가 지헌이 좋아했잖아.”
굳은 채 서 있는 내게 박선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둘이 뭘… 어째?”
귀로 전해 들은 말이 머릿속으로 잘 이해되지 않았다.
“너랑 헤어지고 둘이 좀 친하게 지낸 모양이야.”
“하….”
이건 진짜 센데. 지헌의 약혼자 얘기를 전해 들을 때보다 더 충격이 컸다. 계속 혼자일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설마 그게 다은이일 줄이야.
분명 대학 때 내가 직접 지헌에게 다은이는 어떻냐고 떠본 적도 있었다. 지금 와서 배신감을 느끼는 게 적반하장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 감히 네가?
떠보는 말에 자기 스타일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 심지어 그런 의도를 가진 내게 강한 불쾌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런 네가 어떻게?
지독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더구나 이미 끝난 사이라서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점이 나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
“몰랐어?”
떠보듯이 물어 오는 박선호를 뒤로하고 쾅, 하고 휴게실 문을 열어젖혔다. 다은이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자리 좀 비켜 줘.”
“저녁에 꼭 약 바르고, 나중에 연락해.”
다은의 손길이 보란 듯이 지헌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내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다은이는 똑바로 나를 응시했다. 네가 이럴 자격이 있냐는 듯 단죄하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상실한 내게 와닿지 않았다.
다은이 사라지고 화살이 지헌을 향했다. 지헌은 얼굴에 찔끔 난 상처를 보란 듯이 내밀었다. 나를 위해 싸운 게 퍽 자랑스러운 듯했다.
“연고 좀 발라 주지.”
턱짓으로 탁자 위 약품을 가리키며 은근슬쩍 잡아 오는 손길을 뿌리쳤다.
“나한테 손대지 마.”
“왜 그래?”
“이 쓰레기야.”
원색적인 욕설에 지헌이 눈을 찌푸리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뭐?”
“너 나 복수하려고 잡아 둔 거지? 나 괴롭히니까 행복하니? 쓰레기….”
“도대체 무슨 소리야.”
“너 다은이랑 사귀었다며? 야, 사귈 애가 없어서 다은이를 사귀어? 네가 어떻게….”
끝맺지 못한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다가 욱하고 치받는 감정에 결국 내 입으로 구질구질한 대사를 내뱉고야 말았다.
“너 나 좋아했던 건 맞아?”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폭주하는 감정을 막지는 못했다. 지헌은 어느 순간 조용히 나를 지켜보다가 묘한 얼굴로 물어 왔다.
“그게 신경 쓰여?”
“아니. 착각하지 마. 억울해서 그런 거니까.”
나 혼자만 과거에 얽매여 산 게 억울했다. 생각할수록 서운하고 참담하고 분노가 치민다.
할 거 다 하고 산 주제에 자기만 상처받은 척 순정을 다 바친 척, 온갖 척은 다 했지.
“그러는 너는 나 좋아해?”
“뭐?”
“나랑 결혼할 수 있냐고.”
진지하게 묻는데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선뜻 대답 못 하는 나를 보고 지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아니지? 근데 왜 자꾸 나 흔들어?”
전세가 역전되어 이제는 지헌이 나를 몰아붙였다.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흔드는 거 아냐! 난 그냥… 그래도 어떻게 다은이랑….”
“다은이랑 왜, 사귀면 안 돼? 너 대학 때 다은이하고 나 잘되길 은근히 바랐잖아.”
“…….”
“내가 모를 줄 알아?”
“…지금은 아니야.”
한풀 죽은 음성이 내 귀에도 궁색하게 들렸다.
“그래, 다은이한테 덤핑처럼 안 넘겨줘서 고맙다.”
지헌은 대놓고 비웃었다. 나는 질끈 입술을 깨물다가 더듬더듬 입을 떼었다.
“그게 아니라… 너 조, 좋아하는 것 같아.”
“착각하지 마.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냐. 너 그냥 마음 편하고 몸 편해서 나 만난 거잖아. 당연히 내가 없으면 아쉽겠지.”
서툴게 이어진 고백을 지헌은 단칼에 잘라 냈다.
“넌 날 대할 때 매 순간 네 자존심을 앞세우고 계산을 해. 네가 정말 날 좋아한다고 생각해? 너는 그냥 너에게 무조건 헌신하는 나를 놓치기 싫은 거야. 너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나를 놓치기 싫은 것뿐이지. 네 이기심을 포장하지 마.”
“아니야….”
당황해서 부정하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다. 진짜 아닌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실제로 로펌에서 영향력 있는 지헌을 보면서 지헌이 옆에 있으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냥 본능적으로 그런 계산을 하는 내가 징그러웠다.
“내가 네 마음대로 안 되니까 그래. 또 네 마음대로 되면 날 떠나겠지. 넌 그런 애야.”
흔들리는 나를 보며 지헌은 사형 선고를 내리듯 쐐기를 박았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나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지헌이 단언하니 스스로 혼란에 빠졌다.
입술을 떼었다가 도로 닫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넌 끝까지 잔인하구나.”
“…….”
“그만 가. 피곤하다.”
눈앞에서 쾅 문이 닫혔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지헌이 나만을 싸고돌 때마다 내가 뭐라도 된 듯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좋아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지헌이 제공하는 편의를 당연한 듯이 받아 왔다.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너는 쿨하니까.
거기에는 힘들게 세상을 살아온 날들에 대한 보상 심리도 있었다. 내 팔자의 박복함을 왜 지헌에게 보상받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지헌이 결혼하는 걸 네가 보겠다고? 언제까지? 걔가 애 낳아서 돌잔치 하면 너 거기도 갈래? 그게 뭐 하는 짓이야.”
문득 박선호 말이 떠올랐다.
다른 여자 옆에 서 있는 지헌을 상상하자 마음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다.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눈이 시큰하다. 예전에는 이렇게 울음이 많지 않았는데, 지헌과 다시 재회하면서 툭하면 눈물이 터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지헌이 서 있었다. 지헌은 눈물범벅인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하기 전에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 못 가.”
그러다가 돌연 눈물을 터트리며 지헌에게 매달렸다.
“너도 나랑 같이 있고 싶어 하잖아. 나도 너 좋아하고 너도 나 좋아하는데 왜 자꾸 서로 싸우고 미워해야 해.”
지헌은 고집부리는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넌 여전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이고 대학 때와 하나도 나아진 게 없어.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질리고 지친 듯한 기색이 나를 두렵게 했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지헌에게 걸어가 매달렸다.
“우리 이러지 말자, 지헌아. 우린 분명 서로 사랑하는데 왜 이렇게 괴로워해야 해.”
“…….”
“네가 한 얘기 생각해 봤어. 근데, 그래도 너랑 같이 있고 싶다는 건 진심이야. 같이 있고 싶어.”
눈물범벅으로 지헌에게 호소했다. 지헌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진지하게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너 진짜 나한테 올 수 있어?”
“응, 응.”
“이번에 나한테 오면 나 순순히 안 놔줄 건데.”
“응, 놔주지 마.”
지헌은 그 대답으로는 흡족해 보이지 않았다.
“넌 그냥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내가 만족하고 나에겐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 근데 아니야. 난 이제 그 정도로 만족 못 해. 나 혼자 억지로 끌고 나가는 관계 다신 안 해.”
“응, 이제 내가 다 할게.”
냉큼 대답하고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지헌은 좋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그동안 고생시킨 내가 밉기도 한 모양이었다.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이 마냥 후련하고 좋아 보이진 않았다.
복잡한 얼굴로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뒤끝 있는 말을 남겼다.
“너는 참 양심이 없어.”
“응, 나 양심 없어. 그러니 마음 넓은 네가 잘 좀 봐줘.”
그 말조차도 넙죽 받으며 지헌의 품에 파고들었다. 내 넉살에 결국 지헌도 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