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가랑] 오빠의 노예 - 3
“네, 나도 이제 남들처럼 살아 보고 싶거든요.”
“저런 그렇게 지루한 삶에 내 여자가 만족할 거라고?”
내 여자라니!
한때는 그 말에 황홀해서 정신을 못 차렸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게 얼마나 흔하고 의미 없는지 알아 버렸으니까.
이 영리하고 오만한 남자는 자신이 가진 치명적인 매력으로 여자를 홀려서 편리하게 이용한다.
너무나 당연시된 탓에 양심의 가책 따위 못 느낀다.
“만족하고 말고요. 내가 지금 꿈꾸는 모든 것이니까. 그리고 난 더 이상 오빠 여자가 아니에요. 잊었어요? 우리는 1년 전에 끝났잖아요.”
영아도 그처럼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숨결도 가쁘고 목소리도 심하게 떨려서 아직도 그녀는 어른 앞에 아이 같았다.
아무리 다 자랐다고 큰소리를 쳐도 그의 앞에서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10대로 보일 게 뻔했다.
“아니.”
“뭐라고요?”
“아니라고. 네가 감히 날 속였다는 걸 안 이상은 절대 안 될 말이지.”
이건 무슨 말인지.
영아는 그의 폭풍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두 눈동자 속 적의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뭘 속였다는 건지. 아, 결혼한다고 오빠한테 먼저 말하지 않았다고 이러는 건 오해예요. 청혼을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하지만 교제한 지는 1년째라면서?”
그의 육감적인 입술이 경멸감으로 일그러졌다.
“그, 그랬죠. 앗!”
태욱이 어깨를 꽉 틀어쥐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더 우악스럽게 눌렀다.
그녀는 이제 비명도 못 지른 채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자세를 낮추며 위협적으로 내려다봤다.
“이미 이별 선언하기 전부터 남자가 있었던 거야?”
그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낮아서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아니거든요. 난 분명히…….”
“됐어. 사실이 뭐가 됐건 중요하지 않아. 난 널 다른 남자한테 보낼 생각이 없으니까.”
그는 이대로 모든 것이 일단락났다는 듯 느긋하게 소파에 앉은 채 팔짱을 꼈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태도와는 달리 시선은 그녀를 단숨에 집어삼킬 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 집요한 시선에 벌을 선 아이처럼 그대로 서서 굳어 버렸다.
이럴 때면 늘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두려운 게 아니라 그녀 자신이 두려운 거였다.
처음부터 그랬다. 태욱이 그녀를 여자로 의식하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그를 남자로 강하게 의식했으니까.
그런 자신의 반응이 너무 거세서 고통스러울만큼 괴로웠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그를 원하는 마음조차 크나큰 죄악이었으니까.
그때는 몰랐다.
마음 만으로만 원할 때가 차라리 나을 뻔했다.
욕정이 주는 그 일체감을 알아 버렸을 때는 더 이상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릴 수 없는 단계까지 가버렸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고통, 그건 심신이 산산조각 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도저히 벗어나기 힘든 고문이었다.
이렇게 그의 뜨거운 눈길만으로도 그녀의 피가 끓어오르면서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던 것이다.
그 느낌을 아니까,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이 만나면 얼마나 폭발적인지 이미 알아 버렸으니까.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난 이미 다른 남자한테 갔어요. 오빠가 날 보낼 자격 같은 건 없다고요.”
그가 벌떡 일어나자 영아는 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이내 벽을 짚은 그의 두 손에 갇혀 버렸다.
그의 숨결이 거칠어졌고 그녀의 숨결 또한 가빠졌다. 그가 자세를 낮추자 그녀는 숨을 죽였다.
“내가 자격이 없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떨, 떨어져요. 제발, 오빠 우린 이러면 안 돼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의 몸은 이미 그를 원하고 있었고, 그건 그도 이미 알아차린 후였다.
그가 좀 더 자세를 낮추고 입술을 포개자 그녀는 정신이 산란해졌다.
이대로 항복하고 그를 갖고 싶은 욕정이 거세게 밀어닥쳤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성을 찾아야 했다.
이대로 무너지면 1년 동안 그를 거부했던 고행의 시간이 다 헛된 시간이 된다.
그러면 그녀는 다시 그의 노예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에게 다시 중독되면 끊어 버리지 않는 이상은 이 모든 기쁨이 자학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빼앗기만 하는 그는 약탈자였다.
마음 없이 쾌락만 추구하는 그에게 몸을 맡기는 행위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
뜨거운 훈기에 입술이 절로 열리고 그의 달콤한 혀가 밀고 들어오자 화들짝 놀란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는 그를 힘껏 밀치고 욕실로 달아나 문을 걸어 버렸다.
등을 돌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그가 문을 탕탕, 쳤다.
“문 열어. 당장!”
그는 늘 그렇듯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문을 부술 기세였다.
“안 돼요. 난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내가 지금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을지도 모른다고요.”
이만한 강수를 두면 그가 꺼릴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그럼 같이 병원 가서 확인하든가. 나와.”
“오빠. 제발, 그냥 가버려요. 날 좀 내버려 두라고요.”
“그러려고 했지. 근데 네가 내 목을 자꾸 조르니까 그에 마땅한 응대를 해줘야겠지?”
그때 벌컥 문이 열리자 영아는 고함을 질렀다. 그가 들고 있던 젓가락 하나를 던지며 성큼 들어왔다.
“물러나요.”
“오버하지 마. 난 아무 짓도 안 해. 네가 원하지 않는 한 말이지.”
문제는 그거였다.
태욱이 곁에 있으면 그녀가 원하게 된다. 그것도 절실히.
그는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건 그녀의 취약점이었다.
오직 이 남자만 원한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비참했다. 막연하게 짐작할 때도 그랬지만 확인 사살을 하고 나니 더 심했다.
난, 왜 이 모양일까? 왜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더 원하게 되는 걸까?
이쯤 되면 마조히스트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1년 동안 그를 못 안았더니 갈증이 더 깊어갔다.
이제 숨소리만 들어도 흥분되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아무리 묘안을 짜내도 그는 끄떡도 안 하니 막막해서 정말이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아마 그녀가 울고불고 사정해도 들어줄 기미도 안 보일 것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매번 그에게 승리감을 안겨 준 그녀의 잘못이었다.
혼자서 애를 태우며 그를 은근히 유혹했던 그 대책 없었던 어린 시절까지 포함하면 그의 자신감은 그녀가 심어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령 내가 원한다고 해도 오빠가 날 밀어내야죠.”
영아는 양팔을 낀 채 그와 거리를 유지하느라 세면대가 히프에 닿았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의 검은 눈동자가 번뜩이자 그녀의 심장이 바짝 조여들었다.
“내가 왜?”
그가 바짝 다가오자 그녀는 숨을 삼켰다. 그의 얼굴이 내려오자 그녀는 아예 호흡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오빠는 어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