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서리 - (1/6)
여는 글 - 괴한
이령은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귀를 건드려 잠에서 깼다.
이령은 잠귀가 밝은 편이다.
바람이 조금만 거세어 문을 덜컹거리게 하고 문밖에 있는 나무가 소리를 내며 흔들려도 잠이 깰 정도로 잠귀가 밝다.
아주 어렸을 적 무서운 일을 당한 적이 있어서 그 후유증이라고 의원은 말하곤 했다.
가위에 잘 눌리고 잠귀가 밝아 깊게 잠들지 못하게 된 것은 열 살 때 있었던 끔찍하고 무서웠던 비극 때문이다.
9년 전, 이령은 모친을 잃었다.
부친이 이언궁을 비운 사이 궁에 괴한들이 잠입해서 이언궁의 모든 이가 잔인하게 도륙당하고 죽임당했다.
“여기서 나오면 안 돼. 알겠지? 꼼짝 말고 여기에 있어야 한다. 무슨 소리가 들려도 나와서는 안 돼.”
그렇게 말하며 모친은 이령을 마루 아래에 숨겨 뒀고, 그곳에서 열 살의 이령은 밤새도록 그 무서운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두 손으로 귀를 꽉 막고 그 무서운 소리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그 소리는 계속되었다.
비명, 고함 그리고 무서운 발걸음 소리.
“이령아!”
마루 밑에 숨어 있던 이령을 발견한 것은 새벽이 되어 이언궁으로 돌아온 부친이었다.
저를 향해 손을 내미는 부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이령은 혼절해 버렸다.
그날, 이령은 모친을 잃었다.
그날, 이언궁의 모든 사람이 죽었다.
단 한 명, 이령만 제외하고 모두가 죽었다.
그 후로 이령은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깼다.
어둠이 무서워서 밤에 불을 끄지 못했고, 곁에는 항상 하녀가 있어야 했다.
그 후로 부친은 이령에게 호위 무사를 붙여 주었다.
이령은 어디를 가더라도 호위가 있어야만 안심했고, 잠이 들 때에도 호위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부터 하는 버릇이 생겼다.
“자인아?”
분명히 미세한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문을 흔드는 소리가 아니라 발걸음 소리였다.
“자인아, 밖에 있지?”
자인은 이령을 호위하는 무사의 이름이다.
항상 자인의 곁에서 떠나는 법이 없다.
“자인아.”
하지만 재차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불안감이 이령의 가슴을 스쳤다.
자인이 자리를 비웠을 리가 없다.
“자인아? 은아야?”
호위 무사인 자인은 그렇다 치고, 항상 이령의 곁에서 수발을 드는 몸종 은아도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이령의 불안을 부추겼다.
‘대체 왜. 다들 어디 간 거지?’
가슴에서 불안감이 치솟으며 9년 전의 악몽 같았던 밤이 이령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야. 그럴 리가.’
또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또 그런 무서운 밤이 찾아왔을 리가 없다.
“자, 자인아. 은아야.”
덜덜 떨며 이령이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겁을 잔뜩 먹은 채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손을 더듬어 촛불이 켜져 있는 촛대를 꽉 쥐었다.
여차하면 이것으로 제 몸을 지킬 작정이었다.
그녀가 방문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누구?!’
방문에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다.
시커먼 그림자가 방문 앞에 나타나자 와락 겁을 먹은 이령이 촛대를 꽉 쥐고 뒤로 물러섰다.
“자인아?”
그림자는 사내의 것이었다.
이 밤에 제 처소 주위에 있을 사내는 자인 외에는 없다.
“자인이니?”
자인이라면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일까.
“누, 누구냐!”
이령이 있는 용기를 다 짜내어 소리를 쳤다.
그 순간 방문이 덜컥 열렸다.
“꺄아악!”
방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촛대의 촛불이 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방 안의 촛불들이 꺼지며 어둠이 이령의 시야를 뒤덮었다.
“아악!”
그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이령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읍!”
어둠 속에서 이령이 발버둥을 쳤다.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커먼 인영이 괴물처럼 어둠 속에서 눈을 스칠 뿐이었다.
“읍!”
억센 손이 이령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를 침상으로 쓰러뜨렸다.
‘아, 안 돼!’
침상으로 쓰러지는 순간 이령은 괴한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은 지금 자신을 겁탈하려는 것이다.
‘안 돼! 안 돼!’
겁탈을 당하다니, 그런 짓을 당할 수는 없다.
자신은 머잖아 혼인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겁탈을 당하면 어떻게 정혼자의 낯을 보겠는가.
“읍! 흐읍!”
안간힘을 써 가며 발버둥을 쳤지만 통할 리가 없다.
“읍!”
입에 재갈이 물렸다.
두 손이 위로 올려지더니 천에 칭칭 묶여 버렸다.
입에 재갈이 물리고 양손이 결박당한 이령이 두려움에 질려 온몸을 비틀었다.
그때 괴한의 손이 그녀의 옷을 찢었다.
쫘악-.
옷이 찢겨 나가며 괴한의 손이 제 다리를 벌리려 하자 이령이 그를 걷어찼다.
‘안 돼!’
할 수 있는 모든 저항을 하며 이령이 두 다리로 괴한을 계속 걷어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퍽-.
괴한의 주먹이 이령의 복부를 거칠게 가격했다.
무서운 힘이 복부를 가격하는 순간 이령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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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낯선 사내
황제 금현에게는 일곱 명의 아우가 있었는데, 그중 막내가 칠 왕야 사독이었다.
황제의 아우 칠 왕야 사독에게는 아들이 없이 딸만 한 명 있었고, 그 딸의 이름이 이령이었다.
사독은 딸 이령이 어렸을 때 그의 사저인 이언궁에 침입한 괴한들에게 아내를 잃은 후로 재가를 하지 않아 지금껏 혼자 지내고 있었고, 이령도 형제자매 없이 무남독녀로 자랐다.
이령은 황실을 통틀어서 단 한 명의 공주였다.
황제 금현도 왕자들만 두었고, 그의 형제들인 일곱 왕야들 역시 아들들만 둔지라 사독의 딸 이령이 황제의 자식과 조카들을 통틀어서 유일한 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령은 어려서부터 백부인 황제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황제뿐만 아니라 모든 왕야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황실의 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9년 전 이언궁에서 있었던 비극 이후에는 주위에서 그녀를 가엾게 여기며 더 아껴 주었다.
“너는 크면 문덕과 혼인하거라.”
황제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문덕은 황제의 장남으로, 태자인 동시에 언젠가는 금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소년이었다.
그리고 작년, 이령은 정식으로 문덕과 정혼했다.
예물이 오가고 정혼이 정해져 이제 혼례만 남겨두고 있었다.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나면 이령은 태자비가 되어 이언궁을 떠나 황궁으로 가게 된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혼례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문덕은 무뚝뚝하지만 누가 봐도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는 데다 풍채도 좋아 이령은 문덕의 아내가 되는 것이 싫지 않았다.
자신이 태자비가 되면 혼자 남게 될 부친이 걱정이긴 했지만, 부친은 왕야이니 마음만 먹으면 황궁에 출입할 수 있었다.
생이별을 하는 것이 아니니 혼례로 부친을 만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사달이 났다.
퍼억-! 퍽! 퍽-!
뜰의 한가운데 여러 명의 장정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몽둥이로 얻어맞고 있는 것은 이령의 호위 무사인 자인이었다.
그는 어젯밤 제 주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금 벌을 받는 중이었다.
어젯밤, 이령의 처소에 괴한이 침입해서 그녀를 겁탈하고 도망쳤다.
이령은 밤새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몸종이 그녀의 처소에 들어가 처음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벌거벗겨진 채로 다리 사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했다.
다리 사이에 묻어 있는 혈흔과 이불에 남아 있는 핏자국 그리고 사내의 것으로 보이는 말라붙은 정액이 그녀의 음부에 잔뜩 묻어 있어 그것으로 그녀가 겁탈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밤새 그녀의 처소를 지켰어야 하는 무사 자인은 그때 정신을 잃고 있었다고 변명했다.
저녁에 먹은 것이라고는 차 한 잔뿐이었는데 이상하게 잠이 쏟아져 잠시 눈을 감았던 것이 아침까지 기절해 있었다고, 누가 차에 약을 넣었다고 자인은 애써 변명했다.
하지만 그가 잠든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호위 무사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했고, 그 때문에 그의 작은 주인이 변을 당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자인에게 내려진 최후의 벌은 손목을 잘라 추방하는 것이었다.
이령의 호위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호위 무사 자인이 손목을 잘린 채로 쫓겨나고, 이령의 몸종이었던 은아 역시 태형 쉰 대를 맞고 쫓겨났다.
“폐하께는 내가 말씀을 드리겠다. 네가 중병이 나서 앓아누웠다고 말이다.”
눈물만 흘리는 이령의 앞에 앉은 칠 왕야 사독이 근엄한 얼굴을 한 채로 말했다.
“국혼을 취소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네가 괴한에게 겁탈당했다는 것이 외부로 알려지면 그건 이 아비의 수치인 동시에 너와 혼인할 예정이었던 태자 전하의 수치요, 곧 황제 폐하의 수치다. 알겠느냐?”
이령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그저 눈물만 흘렸다.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령은 전혀 알지 못했다.
괴한이 처소로 침입하여 자신을 침상에 쓰러뜨린 것까지는 기억을 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전혀 없다.
복부를 맞고 혼절했고, 깨어나니 이미 몸에는 참혹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몸에 남은 흔적으로 겁탈당한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정작 그 기억은 전혀 없다.
하지만 기억이 없다 하더라도 그건 이미 명백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누군지도 모르고, 왜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언궁의 담을 넘어왔는지도 알 수 없고, 자인이 마시던 차에 어떻게 약을 넣을 수 있었는지도 전혀 알 길이 없다.
“너는 병을 앓다가 죽은 것으로 할 것이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다.”
“아버님.”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하겠다는 부친의 말에 이령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이미 퉁퉁 부은 눈은 보기에도 처참할 지경이었다.
“내일이라도 이곳을 떠나거라.”
“아버님, 저더러 어디로 가라는 것입니까?”
“금을 챙겨 줄 것이니 어디든 가서 죽은 것처럼 살거라.”
“아버님.”
부친의 말이 모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없다.
자신의 몸만 더럽혀진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닌 것은 맞다.
부친의 명성과 태자의 명예 그리고 황제의 위신까지 자신 때문에 엉망이 될 수도 있다.
“제가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이령이 겨우 말을 이었다.
부친이 저를 빈손으로 내보낼 리가 없다.
하지만 금과 은을 가지고 이 집을 나간다 해도 어디로 간단 말인가.
세상 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데 금과 은을 가지고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그러면 내가 갈 곳을 정해 주면 따르겠느냐?”
“네, 따르겠습니다.”
자신이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은 이 일의 가장 큰 피해자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이령은 알고 있다.
혼인 전이기 망정이지, 혼인한 후에 외간 사내에게 몸이 더럽혀지면 여자는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자결하는 것이 바른 도리라고 배워 왔다.
자신은 아직 혼인 전이지만 정혼을 이미 했다.
혼례만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이 역시 정절을 잃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내일 새벽 일찍, 날이 밝기 전에 집을 떠나야 할 것이니 오늘 준비를 하거라.”
그 말을 마친 사독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처소에 혼자 남은 이령이 침상에 엎드려 다시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대체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누가 왜 자신에게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어렸을 때 겪었던 일로도 불행이 모자라서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것일까.
‘죽이고 싶어. 죽여 버리고 싶어.’
자신을 겁탈한 괴한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 찢어 죽여 버리고 싶다.
그만큼 이령의 마음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더한 절망은 다음 날 새벽에 찾아왔다.
“너는 죽은 것으로 할 것이다. 네 장례도 치르고, 외부에는 네가 죽었다고 알릴 것이다. 폐하께도 그리 알릴 것이고, 태자 전하도 그리 아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가야 할 곳은 도성 밖 도치라는 자의 집이다.”
“도치.”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제 죽은 사람이 된다는 절망 앞에서 들은 낯선 이름에 이령이 부친을 흔들리는 눈동자로 쳐다봤다.
그녀가 챙긴 것은 평소 입던 옷가지 몇 벌과 금은 패물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겨준 유품들이 전부였다.
짐을 많이 꾸릴 수는 없었다.
이령이 꾸릴 수 있는 짐은 겨우 보따리 두 개였다.
“짐승을 도축하며 먹고사는 자다. 천한 사내이긴 하지만, 제 한 몸은 건사하는 사내이니 그 사내에게 가서 살거라.”
사독의 말에 이령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짐승을 도축하는 자라면 백정이다.
그것도 도성 밖에 사는 백정.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살 수 없는 자들이 몇 있다.
하나는 쫓겨난 죄인이요, 또 하나는 전염되는 병을 가진 자들이요, 또 하나는 각설이요, 또 하나는 백정이다.
그런 자들은 도성 안에는 집을 짓고 살지 못해서 도성 밖에서 움막을 짓고 산다.
지금 부친은 그런 자들에게 가서 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버님, 그, 그런 곳에 어떻게.”
“너는 죽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도성 안에서 살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어찌하겠느냐. 도성 밖에 나가서 그런 자들 속에 섞여 살아야 들키지 않고 살 수 있는 법이다.”
사독의 말을 들으며 이령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자신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떠난 직후 이 집에서는 자신의 장례가 치러질 것이다.
시체가 들어 있지 않은 관이 땅에 묻힐 것이고, 이령이라는 이름은 영영 흙 속에 묻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부친의 말이 맞다.
자신은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집안의 수치를 끌어안고 죽어야 한다.
살아 있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도성 안에서는 살 수 없다.
도성 밖에서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자들과,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자들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차라리 진짜 죽여 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죽는 것은 무섭다.
그런 처지로 전락한다고 하더라도 죽는 것은 역시 무섭다.
자신이 겁쟁이라는 사실에 이령은 또 한 번 절망했다.
“날이 밝아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얼른 떠나거라.”
“네, 아버님.”
이령이 눈물을 닦고 일어나 부친의 앞에 두 번 절을 올렸다.
이제 떠나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부친 앞에 두 번의 절을 올린 다음, 이령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밖은 아직 새벽빛이 새파랬다.
뜰에는 집안의 하인이 한 명 서 있었다.
이령을 도성 밖까지 데려갈 하인이었다.
그를 따라서 도성의 북문까지 간 이령은 혼자 북문을 나서야만 했다.
원래 문이 열리는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북문이 열린 것은 하인이 문지기들에게 은전 몇 개를 찔러 준 까닭이었다.
그렇게 이른 새벽 문이 열리고 도성 밖으로 이령이 걸어 나가자 다시 문이 닫혔다.
육중한 문이 등 뒤에서 닫히자 이령은 북문 밖에 홀로 남겨졌다.
이령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도치라는 자가 어디에 사는지도 알지 못했고, 도성 밖의 지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령은 뿌옇게 낀 새벽안개 속에서 걸어오는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인영이 꼭 이야기책 속의 괴물처럼 커서 귀신이나 그 비슷한 것을 만난 것으로 착각해 와락 겁을 먹었지만, 안개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 귀신도 야차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잠시 안도했다.
사내는 얼굴 전체에 덥수룩하게 수염이 뒤덮고 있었고, 머리카락도 엉망으로 기른 것을 마구잡이로 묶어 마치 들짐승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남루하고 거칠었으며, 소매 아래로 나와 있는 손등은 투박하고 울퉁불퉁했다.
검게 그을린 손등을 보니 이령의 속에서 겁이 와락 밀고 올라왔다.
“저, 저어.”
도치라는 분이십니까? 그렇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사내의 손이 더 빨랐다.
“아!”
사내가 이령이 가슴에 꼭 품고 있던 보따리를 휙 빼앗아 제 손에 들고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저어! 잠시만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보따리를 빼앗아 혼자 걷는 사내의 뒤를 얼른 따라가며 이령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사내의 보폭이 큰 탓에 그가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이령은 그를 놓칠세라 잰걸음으로 따라가야만 했다.
사내가 워낙 빠른 탓에 이령은 걸음이 급해지다 못해 마침내 신이 벗겨지고 말았다.
“앗!”
신이 벗겨지며 이령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기요! 잠시만요!”
벗겨진 신을 허둥지둥 신으며 이령이 멀어지는 사내를 소리쳐 불렀다.
만약 사내가 저를 혼자 두고 가 버리면? 금과 은이 든 보따리만 가져가고, 자신을 여기에 두고 가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저기요! 저기!”
안타깝게 사내에게 소리를 지르던 이령이 결국 한쪽 신이 벗겨진 채로 허둥지둥 일어나 사내를 뒤쫓았다.
어쩌면 저리 무정하단 말인가.
여인이 소리쳐 부르면 돌아보는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신을 한쪽만 신은 채로 허겁지겁 쫓아가던 이령이 결국은 발을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흰 버선은 흙투성이였다.
치맛단도 온통 흙으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흑.”
주저앉은 이령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이젠 다 운 줄 알았다.
어제오늘 너무 울어서 이제는 눈물이 남아 있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도 눈물이 쏟아졌다.
서러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저 사내도 자신을 더럽다고 여기는 것일까.
겁탈당한 주제에 목을 매달아 죽지도 않고 그에게 몸을 의지해서 살아가려는 자신을 저 사내도 하찮고 더럽게 여기는 것일까.
거추장스러운 것을 어쩔 수 없이 떠맡았다고 여기는 것일까.
뚝뚝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있을 때였다.
바로 앞에서 움직이는 기척에 이령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온 것인지 사내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사내의 손에는 그녀의 벗겨진 신이 들려 있었다.
사내는 말없이 그녀의 발에 신을 신겨 줬다.
투박한 손이 제 발에 신을 신기는 것을 이령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쳐다봤다.
신을 다 신겨 준 사내가 그녀의 앞에 등을 내밀었다.
업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외간 사내의 등에 쉽게 업힐 수 있을 리가 없다.
“아!”
주저하는 그녀를 둘러업은 사내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았다.
저를 업고 걷는 사내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이령이 다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해도 이 눈물이 그치지 않아 펑펑 흐느껴 우는 이령을 등에 업고 사내는 그저 걸었다.
도성의 북문이 점점 멀어지며 눈물로 흐려진 이령의 시야에 낯선 풍경이 들어올 즈음에, 날이 밝았다.
낯선 곳에서의 아침이었다.
* * *
도치라는 사내가 사는 곳은 도성 북문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 개울을 끼고 이엉을 지붕에 이은 초가집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도치의 집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근처의 다른 집들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언덕이라고 해 봤자 다른 집들보다 조금 더 높을 뿐이었다.
커다란 감나무 두 그루가 마당에 있고, 얕은 지붕은 짚과 이엉을 얹었고, 벽은 흙이었다.
이령은 이런 집에서는 살아 본 적이 없다.
이불은 낡은 데다 솜이라고는 들어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령은 바닥에서 자 본 적이 없다.
이령이 생활하던 이언궁은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단단한 침상이 있었고, 침상에는 서국에서 들여온 비단 보료가 깔려 있었으며 겨울에는 춥지 않게 솜을 누빈 비단 이불이 항상 덮여 있었다.
그리고 온종일 새빨간 숯이 타오르는 화로가 있어서 몸종 은아가 화로의 불을 꺼뜨리지 않게 늘 세심하게 살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령의 겨울은 단 한 번도 추웠던 적이 없었다.
버선에는 항상 도톰하니 솜을 넣었고, 겨울에 입는 옷은 무겁지 않게 새 솜을 타서 지은 솜옷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화로도, 비단 솜이불도 없다.
이언궁에서 나올 때 보따리 안에 챙겨서 온 솜을 누빈 옷이 있지만, 겨우 두세 벌이 고작이다.
버선도 두 켤레밖에는 가져오지 못했다.
무엇보다 흙 위에 널빤지를 얹은 차가운 바닥에 얇은 이불을 깔고 자야 한다는 것이 이령을 당황하게 했다.
흙벽에서는 바람이 숭숭 들어와 밖과 안의 온도 차이가 거의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이령의 입술에서 흩어졌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
이령이 얼어붙은 손에 입김을 호호 불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고 사내가 들어섰다.
사내는 손에 화로를 들고 있었다.
사내보다 그 손에 들린 화로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이령이었다.
사내가 내려놓는 화로 안에는 질 좋은 숯이 아닌 대충 토막 낸 나무 조각들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매캐하게 연기가 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화로가 바닥에 놓이자마자 이령이 얼른 가까이 다가앉아 손을 내밀었다.
‘따뜻해.’
타들어 가는 불꽃의 열기에 이령이 겨우 안도했다.
하지만 몸이 따뜻해지자 이번에는 배가 고파 왔다.
‘배고파. 이 사내는 내게 먹을 것도 주지 않는 걸까?’
이령이 사내를 조심스레 쳐다봤다.
여기까지 자신을 업고 오는 동안 사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까.’
사내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들어왔을 때는 손에 밥상을 들고 있었다.
작은 밥상 위에는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국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만약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이령은 절대로 그 국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꼬박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괴한에게 겁탈당한 것을 알고 나서부터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너무 참담했던 탓에 배가 고픈 것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 겨우 허기가 밀려왔다.
갑자기 몰려오는 허기에 이령은 제가 먹고 있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허겁지겁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자신이 게걸스럽게 먹어 댔다는 것을 알고 이령의 뺨이 붉어졌다.
왕야의 딸이자 황제의 조카인 자신이 체면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국을 퍼먹었다는 것이 배가 채워지자 비로소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령이 국을 다 먹은 것을 확인한 사내가 밥상을 들고 밖으로 나가자 방에는 이령 혼자 남게 되었다.
혼자 남은 이령이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흙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방은 그저 투박하고 삭막했다.
‘내 짐.’
이령이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 금은 패물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령의 관심은 금은 패물이 아니라 죽은 어머니의 유품에 있었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빗과 마지막으로 제게 직접 만들어 줬던 머리댕기가 그것이었다.
붉은 천에 노란색의 실로 수놓은 댕기는 열 살의 생일에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다.
이것과 빗을 이령은 지금까지 고이 간직해 왔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다시 빗과 댕기를 보따리 안에 넣어 둔 이령이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부친은 자신에게 저 사내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라고 했다.
부친의 딸인 이령은 죽은 사람이다.
아마 곧 장례식도 치러질 것이고, 자신을 아는 모든 이에게 자신은 죽은 자가 될 것이다.
이곳에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죽은 자다.
칠 왕야 사독의 딸 이령은 죽었고, 이제 이곳에서 이름 없는 한 여자가 되어 살아가야만 한다.
저 낯선 사내의 아내가 되어서 말이다.
이미 가장 끔찍한 일을 겪었다.
거기에 비하면 저 사내의 아내가 되는 것은 조금 더 나을까?
화로 옆에 웅크리고 앉아 이령이 눈을 감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저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을 쓰러뜨리고 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사내가 예의를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예의도 법도도 알 리가 만무하니 저를 짐승처럼 범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저 사내가 자신을 범한다고 해서 누굴 붙들고 하소연하지도 못한다.
자신은 저 사내에게 보내진 몸이니 말이다.
* * *
퍽-!
퍽-!
밖에서 들려오는 거친 소리에 이령이 눈을 떴다.
‘나 잠들었구나.’
언제 잠든 지도 모른 채 화로 옆에 웅크리고 누워서 잠이 들었던 이령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어깨에서 스르륵 낡은 이불이 흘러내렸다.
잠깐 잠든 사이에 사내가 제 몸에 이불을 덮어 주고 나간 것이 틀림없다.
사내가 아니면 누가 제게 이불을 덮어 주겠는가.
화로 덕분인지 방은 제법 따뜻해졌다.
그래도 바닥은 차가웠다.
이불을 몸에 두른 채로 이령이 살며시 문 쪽으로 다가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한 뼘 정도의 틈새로 밖이 내다보였다.
퍽-! 퍽-!
이 거친 소리는 사내가 도끼로 장작을 패는 소리였다.
마당에서 사내가 도끼로 장작을 패고 있었다.
이미 사내의 옆에는 수북하게 자른 장작이 쌓여 있었고, 사내는 춥지도 않은지 상반신에 옷도 입지 않고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했고, 머리카락 역시 제대로 자르지도 빗지도 않아 산발한 것이 엉겨 붙어서 꼭 산짐승처럼 보였다.
도끼를 쥔 손과 팔은 울퉁불퉁했고, 어깨와 가슴은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꿈틀거렸다.
‘이름이 도치라고 했지.’
왜 이름이 도치일까.
‘여기에 혼자 사는 걸까.’
아무리 봐도 다른 가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버님은 저런 사내를 어떻게 아는 거지?’
누군가를 통해서 저런 사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일까?
가축을 도축해서 고기를 대는 백정이라고 하니, 어쩌면 청지기나 집안일을 보는 하인 중 누군가를 통해서 알게 된 사내일 수도 있다.
‘자인과 은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을 지키지 못한 죄로 양손이 잘려 쫓겨난 자인과 매질을 수십 번 당하고 쫓겨난 은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너무 끔찍하고 참담해서 미처 자인과 은아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령이 뒤늦게 깨달았다.
그 두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그런데도 자신 때문에 그 두 사람까지 벌을 받았다.
은아는 거의 몇 년 동안 곁에서 말동무를 해 주었던 몸종이다.
이제는 몸종이라기보다는 친구와 자매에 가깝다.
이 엄동설한에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자인은 또 어떠한가.
몇 년 전의 그 끔찍한 일 이후 부친이 제게 붙여 준 호위 무사인 자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다.
누구보다 자신을 잘 지켜 주었다.
그런데 양손이 잘려 나갔으니 그는 이제 어떻게 될까.
칼을 쓰는 사내가 손이 잘려 칼을 쥘 수 없으니 그의 삶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방에 침입해서 자신을 겁탈한 괴한은 자신의 인생만 망친 것이 아니라 자인과 은아의 삶도 망쳤다.
결국 그 때문에 세 명의 삶이 망가졌다.
그때였다.
‘아.’
문틈으로 밖을 엿보던 이령이 얼른 문을 닫았다.
사내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눈이 마주쳤어.’
고작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드, 들어오면 어쩌지?’
이 방은 저 사내의 것이다.
저 사내가 들어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이령은 이 좁은 방 안에 저 사내가 들어올까 그것이 걱정스럽고 무서웠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잠시 후 다시 밖에서 장작을 패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장작 패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로 이령이 몸에 두른 이불을 손으로 여몄다.
이불은 낡았지만 냄새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햇볕에 잘 말린 것처럼 기분 좋은 햇살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이령이 생각했다.
* * *
도치라는 이름의 사내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령은 그날 저녁에야 알게 되었다.
“네?”
사내는 그릇을 손으로 가리킨 다음 그것을 다 마시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말로 하지 않고 손짓으로 시늉을 하는 사내를 보며 이령은 그제야 이 사내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시라구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차려 준 저녁밥을 다 먹은 이령에게 사내가 내민 것은 시커먼 것이 담긴 그릇이었다.
그릇 안에 담긴 시커먼 것은 약이었다.
다만 그 약이 무슨 약인지 알 수가 없어 이령은 그것을 쉽게 먹지 못했다.
‘대체 무슨 약이지?’
그런데도 사내는 계속 마시라고 시늉을 했다.
‘어쩌지?’
망설이던 이령이 어쩔 수 없이 그릇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써.’
약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썼다.
이령은 이렇게 쓴 약을 처음 마셨다.
원래 쓴 약을 잘 먹지 못하지만, 지금은 마시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사내가 앞에서 저를 뻔히 쳐다보는데 어떻게 마시지 않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눈을 질끈 감고 그릇 안에 담긴 쓴 약을 전부 마시자 그녀가 빈 그릇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사내가 뭔가를 내밀었다.
그것이 잘게 자른 엿이라는 걸 이령도 알아차렸다.
쓴 약을 마셨으니 입가심으로 먹을 엿을 잘게 잘라 준비한 것이 틀림없다.
망설이던 이령이 사내의 손에서 엿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무슨 약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물어봤자 사내가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저녁 밥상을 치운 후 사내는 바닥에 요와 이불을 깔아 잠자리를 마련해 줬다.
낡았지만 깨끗한 요를 깔고 그 옆에 화로를 놓아주고는 이령에게 누우라고 손짓했다.
사내의 잠자리는 화로 건너편이었다.
화로를 사이에 두고 사내와 나란히 누워 잠들게 된 것이다.
그것이 이령은 뜻밖이었다.
실은 오늘 밤 사내가 저를 범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혼례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이 사내의 아내로 살아가야 한다.
오늘이 그 첫날이니 당연히 사내가 저를 취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사내가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따로 자려는 것이 분명했다.
요 하나에 베개 두 개가 아니라 각각의 요를 따로 펴서 화로를 사이에 두고 간격을 유지하고 잘 수 있게 자리를 본 것이다.
물론 이령으로서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사내가 왜 이렇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아직은 낯설기 이를 데 없는 사내에게 제 몸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이령은 그저 안심이 될 뿐이었다.
방을 밝히던 등잔의 불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는데도 이령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낯선 곳에서 보내는 첫날밤이다.
게다가 이령은 어두운 것을 무서워한다.
이렇게 어두운 방에서, 낯선 사내가 곁에 있는데 잠이 올 리가 없다.
사내는 눕자마자 잠이 들었는지 낮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오늘 저 사내가 한 것은 온종일 일을 하고 이령의 끼니를 세 번 차려 준 것이 전부다.
끼니를 차려 줄 때 외에는 이령에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이 사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이령이 몸을 뒤척였다.
방 안이 아주 어둡지 않은 것은 화로의 불꽃 때문이다.
화로의 장작이 타오르며 방 안을 불그스레하게 물들였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와 사내의 낮은 숨소리 그리고 벽에 어른거리는 불빛의 그림자.
이령의 눈길이 화로 건너편에서 잠들어 있는 사내에게 머물렀다.
‘나를 왜 맡은 걸까.’
참 이상한 사내다.
제게 먹인 약은 무엇이고, 또 제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건 무슨 까닭일까.
저를 떠맡았을 때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여자가 필요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부친에게서 꽤 두둑한 돈을 받았을 수도 있다.
제게 대해 주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잘해 주려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잘해 주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뿐이다.
제게 가까이 오려 하지 않는다.
‘역시 더럽혀진 여자는 필요 없다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높은 분에게 돈을 받고 부탁을 받았으니 거절은 못 하고, 돈을 받은 이상 잘해 주긴 해야겠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괴한에게 겁탈당한 여자를 아내로 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서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것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결국 자신은 이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이곳에 버려진 것이고, 저 사내에게도 자신은 조금 거추장스러운 짐 덩어리에 불과하리라.
세상 어디에도 자신을 기꺼이 받아 주고 보듬어 줄 곳이 없다는 생각에 이령의 안에서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눈물이 왈칵 솟구쳤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울지 않았다.
죽을 용기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살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말이다.
이령이 눈을 꼭 감았다.
바람이 문을 흔드는 소리가 귀를 스쳤다.
꼭 그 일이 있었던 그 날 밤이 머릿속에 떠올라 이령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기억이 났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괴한, 제 입을 틀어막고 강제로 옷을 찢던 손길, 그리고 제 다리를 벌리던 감각까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잊어버리고 싶지만 잊히지가 않는다.
그 숨소리, 그 손바닥의 감촉까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겁탈당할 때의 기억은 없다는 것이다.
복부를 얻어맞고 기절해 있을 때 모든 것이 끝나서 그때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 유일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때의 기억까지 선명하다면 자신은 정말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달았을 수도 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떻게 하지?’
요의를 느낀 이령이 이불 안에서 고민했다.
온종일 볼일을 보지 않았다.
지금 처음으로 요의가 치밀었다.
이전에 살던 이언궁에서는 따로 뒷간에 가지 않고 몸종이 가져오는 매화틀에 볼일을 봤다.
그러나 여기에 매화틀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뒷간에는 가 본 적이 없다.
이언궁에서도 하인들이 사용하는 뒷간에 가 본 적이 없는데, 이런 초가집의 뒷간에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쩌지?’
꾹 참고 있으려니 점점 요의가 강해졌다.
이러다가 옷에 실례를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떡하지. 어쩌면 좋아.’
결국 이령이 조심스레 이불을 밀어내고 일어났다.
사내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방을 둘러봤지만 당연히 매화틀은 보이지 않았다.
‘밤이니까 아무도 보지 않으면.’
결국 이령이 생각해 낸 방법은 아무도 보지 않으면 마당 한구석에 몰래 볼일을 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령이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은 어두컴컴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마당을 보자 이령은 덜컥 겁이 났다.
멀리서 산짐승의 울음소리 비슷한 것도 들려왔다.
울타리 아래에서 볼일을 보면 되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겨우 용기를 짜내 마당으로 내려서니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다.
‘무, 무서워.’
가뜩이나 겁이 많은데 이렇게 어두우니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울타리 쪽으로 발을 옮겨 놓을 때였다.
바스락.
“꺄아악!”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령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쥐 한 마리가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였지만, 이령은 이미 혼이 거의 빠져나갈 정도로 놀라 머리를 싸매고 엎드려 덜덜 떨었다.
그때였다.
이령의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이 있었다.
“꺄아악! 꺄악!”
그 손길이 무서워서 이령이 비명을 더 높게 지르자 그 손이 이령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비명을 지르던 이령이 겨우 용기를 내서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제 옆에 앉아 저를 쳐다보는 사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내였다.
조금 전까지 방 안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잠들어 있던 그 사내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내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사내가 손을 들어 감나무 아래를 가리켰다.
“저쪽에서…… 나무 아래에서.”
그 손길을 따라 눈길을 주던 이령은 곧 사내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렸다.
볼일을 보고 싶으면 감나무 아래에서 보라는 뜻이었다.
사내가 그의 가슴을 손으로 치고는 다시 땅을 툭툭 짚었다.
자신이 여기에 있겠다는 뜻이다.
여기에 있을 것이니 무서워하지 말고 감나무 아래에서 볼일을 보라는 사내의 손짓에 이령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리고 감나무 아래로 걸어가서 치맛단을 걷어 올렸다.
사내 쪽을 힐끔 보니 사내는 돌아서서 이쪽을 등지고 서 있었다.
볼일을 보는 동안 이쪽은 보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이령이 감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레 볼일을 봤다.
사내는 이쪽을 등지고 서 있었지만, 그래도 소리가 들리는 것이 부끄러웠다.
쪼르르, 쪼르르, 소리가 크게 울려 이령의 뺨과 귀가 달아올랐다.
얼른 그쳤으면 좋으련만 온종일 참았던 것이 나오는지라 좀처럼 멎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볼일을 본 이령이 얼른 일어나 치마를 내렸다.
그리고 그때까지 등지고 서 있던 사내의 뒤로 다가가 그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고마워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령이 감사의 말을 끄집어냈다.
그냥 고마웠다.
무엇이 고마운지 하나하나 말하라면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고마웠다.
이 어두운 밤에 이 마당에 자신을 등지고 서서 이렇게 계속 기다려 준 것이 그냥 마냥 고마웠다.
“정말…… 고마워요.”
등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리고 서 있자 사내가 슬쩍 돌아봤다.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엿보이는 눈매가 무섭지도, 사납지도 않았다.
적어도 이령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괴한에게 겁탈당하고, 믿었던 부친에게서조차 버려졌는데 이런 곳에서 어쩌면 낯설고 무서울 수 있는 사내에게서 안도감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오늘이 이곳에서의 첫날, 무섭고 두려워야 하는 날이지만 이 사내 덕분에 그 첫날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