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노예 - 28
자제심을 잃은 채 신랄한 태욱이었다. 이런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감정은 뒷전이었다. 이러다 집에 혼자 있게 되면 펑펑 울 게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모친의 뜻을 따르기 힘들 테니까.
“그건 그때 생각해야죠. 우리 짐 챙겨요. 시간이 없어요.”
영아는 황급히 짐을 챙기고 난 후 택시를 불렀다.
“내가 데려다줄게.”
“아뇨, 우리 여기서 헤어져요.”
하지만 그는 현관문을 큰 키로 가로막고 서서 그녀를 노려봤다.
“이 대답은 들어야겠어.”
“뭘요?”
그는 바로 묻지 않고 혀끝을 입 안에서 굴렸다. 그 모습은 극도로 긴장할 때 초등학생들을 연상시켰다.
“아버지 때문에 죽도록 겁이 나서 날 버리는 건 아니라고. 빨리 대답해. 어서.”
갈라진 목소리에 진한 고통이 전해졌다.
죽도록 겁이 나는 건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가 버릴까 봐 또다시 버림받을까 봐.
그는 마치 존재 가치조차 의심스러웠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시절 악몽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라서 그의 나이조차 잊게 한 것이다.
그녀는 목이 메었다. 이건 간간이 얼굴을 보았지만 연인으로 끊어냈던 1년 전과는 상황이 너무 달랐던 것이다. 그때는 외부 압력도 없었으니까.
낌새만 보여도 모친의 경고는 가차 없이 실행에 옮길 것이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약한 모습을 보니 그녀가 막상 죽도록 겁이 나는 건 그가 무너질까 봐였다.
그녀가 곁에 없을 때 그가 잘못되면 어쩌나 싶은 게 무서운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우린 만날 거예요. 어떤 식으로든지 만날 거예요. 난 오빠를 버릴 수 없어요. 오빠는 바로 내 자신인걸요.”
그녀가 떨리는 손길로 얼어붙은 그의 얼굴을 가져갔다.
그는 그녀의 손이 닿기 무섭게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덮었다. 그의 거칠고 뜨거운 손길은 절박한 믿음이 느껴졌다.
그때 택시가 도착했다고 톡이 왔다.
그녀가 손을 풀려고 했지만 그는 다급하게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맞닿은 두 입술에서 굶주린 듯 필사적인 영혼이 느껴졌다.
채워도 채워도 허기가 느껴졌다. 떨어지면 죽을 것 같고, 긴 세월을 함께 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잊지 마.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걸. 그러니까, 우리 이별은 일시적이고 만남은 필연이야.”
그녀가 떠날 때 그가 단단히 일렀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면 정말 엉엉 울 것 같았으니까.
똑똑!
안 회장은 서재 문을 노크하고 잠시 기다렸다.
태욱의 중저음 목소리는 감정 없이 차분했다. 안 회장은 한숨을 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쯤 태욱이 커피를 마신다는 것을 알았지만 안 회장은 커피 대신 샌드위치와 따뜻한 우유를 들고 책상 위에 쟁반을 올렸다.
“먹고 일해.”
“놓고 가십시오.”
태욱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서류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 주 일요일에 아버지 생신인 거 알지?”
태욱은 금테 안경을 벗고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살이 빠져서 초췌한 얼굴을 보니 안 회장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지난달에 부산 출장 가서 영아를 만났는데 딸아이 얼굴이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뼈만 앙상해 보였다.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더 작아지고 허리는 개미허리처럼 잘록했다.
5개월 전 상상도 못 했던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난 후 안 회장은 격노했다.
패륜이나 다름없는 남매 관계를 누가 알까 봐 수습하기 급급했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반항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정도로 자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데 뜻밖에 두 아이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따르니 의심스러웠다.
몰래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사람까지 붙였지만 어떤 낌새도 없었다.
그러니 이제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고 두 아이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을 끊어 낸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 회장도 잘 아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는 했다.
그렇다고 허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제발 두 아이가 마음을 다스리기를 바랐다.
“죄송합니다. 잊고 있었습니다.”
하긴 태욱이 기억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아들은 기계적으로 일만하고 사적인 부분은 일절 허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랑은 사랑으로 치료해야 한다. 하지만 태욱이 오직 한 사람한테만 마음을 붙일 수 있다는 말을 할 때 애절한 진심을 봤으니 선을 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리산 별장에서 아버지 작업 중이니 거기서 생일 파티하기로 했다. 영아도 오라고 할 테니 마음 잘 추스르고 허튼짓은 안 할 거라고 믿어도 되겠지?”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을 보면 이제 이 정도 만남은 가져도 될 것 같았다.
짐작대로 그녀의 섬뜩한 경고가 통했던 모양이니 조금 풀어 줘도 다른 생각은 못 할 것이다.
그녀는 두 아이의 착한 심성을 믿었다.
태욱은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했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다. 태욱은 속이 깊었고 이타심이 있는 아이였다.
태욱은 의무감이라고 하지만 그건 배려심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태욱은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태어날 때부터 저절로 속한 가족이 아니라 오랫동안 소망해서 얻게 되고 그 후 노력으로 지켜 온 가족이었다.
그러니 그의 잘못으로 가족이 산산조각 날지도 모르는 섣부른 행동은 못 할 것이다.
“네.”
태욱의 목소리에 생기가 느껴지자 안 회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천지가 개벽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러니 아버지 앞에서 행동 조심하고 절대 단둘이서 만나면 안 돼. 약속할 수 있어?”
“네, 약속드리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욱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지친 듯 긴 숨을 내뱉었다.
그녀 나름대로 배려해 준 건 맞지만 저렇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공손함은 듣기가 불편했다.
“너, 내가 너무하다고 생각하니?”
“아닙니다.”
“그럼 공정하다고 생각하니?”
무미건조한 태도가 싫어서 툭, 던진 말이었다. 역시나 태욱의 잘생긴 얼굴에 폭풍이 일었다.
“어머니. 전 공정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전 이기적인 놈이고 제 입장에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만 이기적인 건 아냐. 나도 내 입장만 생각하는 건 사실이니까. 어쩌면 너보다 내가 더 이기적일지도 모르지. 근데 내가 변하기를 바라지 마. 늙은이는 마음이 변하지 않으니까. 그저 살아온 대로 살 뿐이지.”
“알겠습니다.”
태욱이 안경을 쓰고 다시 서류를 들었다.
“샌드위치도 먹어. 이러다 너도 영아처럼 뼈만 남겠다. 아버지는 사정도 모르고 어디 아픈 거 아니냐며 묻더라. 영아는 내 눈치 보면서 학교 일이 힘들어서 그렇다고 얼버무리는데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보약이라도 지어서 보냈는데 잘 챙겨 먹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