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노예 - 33
“좀 앉아서 물이라도 마셔. 아직 수술 마치려면 적어도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해. 밥도 안 먹고 물도 잘 안 마시고 도대체 어떻게 버티려고 이래? 병간호하려면 너부터 강해져야지.”
안 회장은 태욱이 닫힌 수술실 문만 뚫어지게 보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억지로 잡고 의자에 앉혔다.
사 작가는 담배 피우러 초조한 마음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는 남편보다 아들이 더 신경 쓰였다. 그만큼 태욱한테 영아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태욱은 영아의 검사 결과를 듣고 난 후 거의 초주검이 된 상태였다. 심지어 어젯밤에는 아들이 병원 비상구 벽에 기댄 채 숨죽여 우는 모습까지 봤다.
충격이었다. 안 회장은 태욱이 우는 모습을 처음 봤던 것이다. 태욱은 아이 때도 울지 않았다. 심지어 부친을 잃었을 때도 멍한 상태에서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감정을 잘 죽였던 태욱이 벽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흐느꼈다. 차라리 그녀한테 안겨서 울었으면 달래 주기라도 했을 텐데 태욱은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쓸쓸히 울었다.
그제야 태욱에게 오직 한 사람만이 마음을 붙일 수 있다는 말이 훅, 들어왔다.
태생부터 고독한 아이라 앙상한 겨울나무처럼 스산한 가슴에 아무도 품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생부조차 온전히 깊은 마음에 들이지 못했던 아이였다.
그렇게 마음을 잘 열지 못했던 아이가 처음으로 들였던 아이가 하필 영아였다니 이제 괘씸함보다 안쓰러움 마음이 더 커졌다.
상상도 하기 싫지만 만약 영아가 잘못된다면 저 아이까지 잃을까 봐 겁이 났다.
태욱은 영아를 잃고는 살 수 없을 것이다.
둘이라는 충만한 기쁨이 어떤지 아는데 이미 활기찬 봄을 알아 버렸는데. 생기 없는 긴긴 겨울은 죽음보다 더 고달픈 잔혹한 고문일 것이다.
안 회장은 그런 아들을 보고 깨달았다. 전에는 그녀가 태욱을 좋아하지만 사랑은 아닌 줄 알았다. 그저 이해 충만한 관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저렇게 죽을 듯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보니 잘못 알았다. 사랑이었다.
안 회장은 아들을 사랑했다. 그녀가 가장 힘들 때 태욱이 묵묵히 편이 되어 힘이 되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나무가 되어 준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살려 달라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할 때 처음으로 부탁할 때 가차 없이 내쳤다. 그녀의 명예와 사회적 위신 때문에 가족을 파괴할 수도 있다고 생명 줄을 쥐고 있는 저승사자처럼 결론을 내려 버렸다.
만약 그녀가 그 아이들의 뜻을 심사숙고해서 품어 줬더라면 적어도 시간을 갖고 고민이라도 해보자고 했다면 영아가 저렇게 자신을 혹사해서 건강을 해쳤을까? 쓰디쓴 후한에 안 회장의 가슴속 깊은 곳에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미안하다. 아들아. 엄마가…….”
안 회장은 가슴이 바위처럼 얹힌 짐을 덜어내듯 사과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태욱은 자신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직 닫힌 수술실만 보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정신이 산란해서 이발할 겨를이 없는 탓에 목덜미를 덮고 있는 숱 많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얼마나 무서울까. 얼마나 아플까.”
그는 영아를 향한 걱정으로 혼잣말을 하며 숨을 제대로 못 쉬는 것처럼 폐 속 깊이 공기를 불어 넣었다.
안 회장은 굳이 위로한답시고 괜찮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태욱이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었다. 적어도 안 회장의 위로는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괴로워하는 태욱을 지켜보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안 회장은 남편을 찾아 나섰다. 남편은 주차장 입구 자갈밭에서 하늘을 보며 연거푸 담배만 빨고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남편은 딸 앞에서는 미소도 보여주고 괜찮을 거라며 의연한 척했지만 병실 밖에서 나오면 말을 하지 않았다.
“여보.”
안 회장을 발견한 남편은 얼른 담배를 비며 끄고 항아리에 던져 넣었다.
“수술 끝났어?”
“아뇨, 아직 두 시간은 남았을 거예요.”
남편은 다시 담배를 꺼내려고 하자 안 회장이 말렸다.
“미안해. 이거라도 피워야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태욱이한테 가봐요. 그 아이한테 영아 어린 시절이라든지 추억이라도 나눠 줘요. 그러면 태욱이도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난 영아도 걱정되지만 내 아들도 너무 걱정돼요.
아, 미치겠어요. 애가 정신 줄을 놓은 것 같아.
그리고 당신한테 내가 못 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영아가 건강을 찾으면 차츰 하고요. 일단 태욱이 정신 좀 차리게 해줘요.
도저히 저대로 지켜볼 수가 없는데 난 아무것도 못 하겠거든요. 난 지금 태욱이한테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것 같으니까.”
안 회장은 남편을 끌다시피 태욱 곁에 앉히고 두 사람만 있게 밖으로 나갔다.
“난 영아한테 잘못한 게 너무 많은 애비네.”
태욱은 떨고 있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수한의 차가운 손을 멍하니 쳐다봤다.
“영아도 아버지한테 늘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왜?”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사랑하는 부인을 잃었으니까요. 그래서 1년 동안 아버지가 자기를 찾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수한은 입술을 꼭 깨문 채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세상에 그걸 알고 있었다니.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외할머니 장례식에서 친척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아, 세상에 비밀이 없다더니. 하긴 내가 지은 죄가 있으니 변명의 여지는 없지. 아내를 잃고 나서 1년 동안은 딸이 원흉 같았지.
정말 옹졸하고 못난 놈이었어. 하지만 아내의 기일에 꿈을 꾸고 정신을 차렸지. 아내가 나타나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 딸을 잊지 말라고 당부를 하더라고.
1년 만에 딸을 봤는데 그 아이가 걷지 뭔가. 나한테 아빠라고 하면서. 순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그 아이를 안고 펑펑 울었지.
아이의 소중한 1년을 잃어버렸던 거지. 천사 같은 신생아에서 옹알이하는 모습도 뒤집기 하는 모습도 다 놓쳐 버렸어.
하지만 깨달음도 잠시 남자 혼자서 딸아이를 키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어. 딸한테는 아빠보다 엄마가 정서적으로 꼭 필요하거든. 딸이 엄마 없이 자라는 건 아들이 엄마 없이 자라는 것보다 더 허해.
난 그 빈 가슴을 채워 주기에는 너무 바빴어. 작품 하나 시작하면 딸을 잊기 일쑤였으니까. 그러다 작품이 끝나면 여행을 갔는데 딸한테 유일하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 뭐랄까 보상 차원이었지. 그마저도 고양이 때문에 못 가게 됐지만.”
“들었습니다. 예삐라고 분리 불안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수한은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공감 어린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 예삐였지. 그 이름은 그 애 외할머니가 영아 애칭으로 불렀던 이름이었는데 고양이한테 제 애칭을 붙였지 뭔가. 외로웠던 게지. 형제자매 있는 아이를 몹시도 부러워했거든. 그래서 너무 예뻐했던 게 화근이었지. 어느새 그 아이 애정에 길든 고양이가 영아 없이는 한시도 못살 것처럼 필사적으로 필요로 하더라고.”
그는 고양이의 분리 불안이 자신의 일처럼 뼛속 깊이 잘 이해되었다.
“굶주린 영혼은 닮은 영혼을 알아보는 법이지요. 그러니 자신이 살려고 필사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걸 아니까.”
수한의 깊은 눈동자가 아련해졌다.
“맞아. 나도 그런 사람을 만났지. 영아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 준 선물이었어. 덕분에 내가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으니까. 난 말일세. 믿네. 그 사람이 우리 딸을 지켜 줄 거라고.”
그는 그제야 비수처럼 가슴을 뒤트는 고통과 파도처럼 덮치는 불안감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영아한테도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그럼, 어제 해줬지. 그리고 내 딸이 나한테 버팀목이 되어 줬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것도 말일세. 비록 무신경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는 못했지만 늘 내 딸은 내 마음의 지주라고. 그리고 세상의 눈이나 관습보다 내 딸 행복이 더 소중하다는 것도 알려줬다네.”
그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뚫어지게 보자 수한은 긴 한숨을 뱉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딸이 사춘기 시절 자네를 소녀 같은 감성으로 선망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네. 태욱이 넌 난다긴다하는 잘생긴 배우들한테 익숙한 내 눈에도 특출할 정도로 잘생긴 데다 명석한 두뇌와 함께 주위를 압도하는 아우라는 게 있거든.
그래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네. 나이 차도 있고 자네는 다 가진 데다 비슷한 배경의 여자가 곁에 있었으니까.
영아가 자네 스타일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 괜히 알은척해서 긁어 부스럼 만들기보다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지.
영아가 결혼할 남자를 데려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갑자기 헤어졌다고 하고 어제 두 사람 병실에서 같이 있는데 그 표정은 남매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만큼 절실해 보였네. 아까 말하는 걸 보니 네 엄마도 알아차린 것 같고.”